앨런 그린스펀 Fed 의장이 보여준 '시장친화' 중앙은행의 묘기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앨런 그린스펀은 1987~2006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 의장을 지냈다. 2000년 이후 정책이 2007년 금융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1990년대 미국 경제 호황기에 보여준 그의 선제적이면서도 시장친화적인 통화정책은 1990년대 미국 경제의 호황을 장기화시켰다.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14] 지금까지는 “이게 무슨 외환위기 일기장이냐” 싶은 얘기만 지속되고 있다. 말 그대로 자기 은행 다닌 일기장이지 무슨 국가 최대 경제 위기를 겪은 얘기냐는 독자들 의견도 있을 수 있다.

환율이 20원씩 단계적으로 무너져가는 그런 얘기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라는 말씀을 드린다. 그것은 1996년 8월 내가 다시 조사반으로 돌아가는 시점부터다. 현재 시점은 5개월 전인 1996년 3월이다. 이 시리즈가 시작한 1995년 6월부터는 9개월이 지났다.

그 이전에는, 당시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어떻게 무서운 위기의 발톱을 감추고 있었는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얘기들이 더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음이 사회 구조화돼 있던 것들에 대한 회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어리석음은 단지 사회 지도층들에게만 책임을 돌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순진하게 하루하루 살아간 사람들만의 책임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딱히 누구에게 대놓고 따지기도 힘든, 우리에게 너무나 체질화돼 있던 것들이다.

하지만 오늘은 앞선 내용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경제·금융적인 얘기를 해야겠다. 이 시리즈의 결말은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는 근본적으로 왜 생겼나를 다룰 수 밖에 없다. 물론 일개 말단 은행원 출신의 서생 하나가 이에 대한 답을 내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독자들께서 저마다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경험과 자료들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이 시리즈의 결말에 들어갈 첫 번째 내용이 된다. 1997년 위기를 가져오게 되는 국제 금융환경의 변화다. 그것을 말단 은행원이 어떻게 지켜보게 됐냐는 것이다.

1996년 초의 어느 날, 내가 일하는 외화자금실의 김진건 실장이 외국 손님을 배웅하러 엘리베이터 앞에 있었다. 외국 손님이 김 실장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일없이 주변을 지나가는 내 귀에는 아무것도 안 들리고 오직 “Friday crisis”라는 말만 들어왔다.

금요일 위기가 지금 내가 기억을 더듬는 힌트인데, 정확하게 어떤 날인지는 자신 있게 기억하기 힘들다. 2월16일 아니면 3월8일 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금요일이라서 기억이 더 어렵다.

2월16일, 미국 채권시장의 지표금리인 30년만기 재무부채권 수익률이 6.23%에서 6.39%로 치솟았다. 통상 하루 변동 폭이 0.02~0.04%포인트인 채권시장에서 0.15% 상승이면 천지가 뒤집히는 대혼란이다. 당시 본드과에서 일하던 이승호 씨는 외국딜러들에게 이런 날은 “3년 농사 하루에 날리는 날”이라고 했다.

3월8일은 6.46%에서 6.70%로 0.24%포인트 폭등했다. 5년 농사가 날아갈 날이다.

내 기억을 얹어서 이 날들을 설명하면 이렇다.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 의장이 “미국 주가가 너무나 부풀려졌다(exuberant)”라고 말했다. 중앙은행 수장이 주가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매우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주식 투자자들이 주목한건 주가가 과도하게 올랐다니 중앙은행 총재가 할 일은 무엇이겠나였다. 금리 인상을 경고한 것이다. 이것을 나는 2월16일 금리 급등한 날의 일로 생각한다.

3월8일의 금리 급등은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이 4%대의 놀라운 성장세를 나타낸 날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것은 당시 금융시장 일지를 보면 확인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혹시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것이라면 독자들께서 지적해 주시기를 바란다.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1996년 초에 미국 금리가 폭등한 날이 이틀이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는 그린스펀 의장의 발언에 의한 것이고 나중 것이 GDP 발표에 의한 것이다.

이로부터 얼마 후 Fed는 금리 인상을 단행했는데, 정작 이 날은 채권시장이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까지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내용이다.

이 상황을 정리하자면, 그린스펀 의장은 미국 금융시장이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먼저 경고발언을 했던 것이다.

시장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생산성이 1996년 미국 경제에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한 그린스펀 의장과 Fed는 금리 인상을 작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장이 금리 인상 가능성을 거의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이자 이를 구두 경고한 것이고, 이 경고는 2주일 후의 GDP 발표로 인해 입증이 됐던 것이다.

두 차례 금리 폭등을 통해 시장은 드디어 Fed와 경제를 보는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3년 농사, 5년 농사를 망친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만약 그린스펀의 경고 발언이 없었다면 GDP 발표나 금리 인상 당일 훨씬 더 많은 투자자들이 더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나는 이 때 일을 중앙은행이 보여준 최고의 정책 행태라고 생각한다. 시장의 명백히 잘못된 판단에 대해 정책당국자들이 지속적인 신호를 보내 피해를 최소화시킨 경우다. 한국은행을 취재할 때 우리나라 중앙은행은 언제 이런 모습을 보여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미국은 이 때 IT 혁신이 가져 온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 호황은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를 겪는데 하나의 외부 환경요인을 만들고 있었다. 생산성이 높아진 미국 경제는 더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다. 외부에 나가 있던 자금을 미국 내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한국을 비롯해 이머징 마켓의 성장세를 누리던 자금들이 이제는 미국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됐던 것이다.

Fed는 1994년부터 연속적인 금리 인상을 통해 기준금리인 연방기금금리를 3%에서 6%로 올려놓고 있었다. 경제 호황기에 금리 인상은 인플레이션 발생을 예방해주는 본연의 목적을 갖고 있다. 또한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이 더 있다.

첫째, 연속 금리 인상을 통해 차입비용을 지속적으로 높임으로써 생산성이 떨어지는 부실기업까지 적당히 호황기에 묻혀 넘어가 후일의 골칫거리가 되는 것을 막아준다.

둘째, 생산성이 높은 만큼 어떻든 미국 경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그걸 높은 이자율로써 마련해 온다는 점이다.

가장 안전성이 높은 미국의 금리가 두 배로 높아진다는데 이를 외면할 자금은 없다. 국제 자금의 역류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련기사: 3년 후 미국 금리가 지금보다 14배나 될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1996년 3월의 미국국채 대란은 이런 와중에 발생한 것이다.

이때의 미국 금리 폭등 자체가 한국 경제에 직격탄을 준 것은 없다. 혹시 내가 그때 파생상품반에서 컨퍼메이션 관리 등 비교적 편한 일만 하고 있어서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상급자로 모신 윤재근 산업은행 부행장 또한 그때 금리 폭등했다고 특별히 고생할 상황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때 우리 팀이 주력한 것은 통화스왑이었다. 일부 금리 스왑이 있긴 했지만 이것은 능동적이기보다는 고객 입장으로 들어가서 하나의 거래에는 그에 따른 반대 거래도 해 놓고 있었다. 옆의 본드과에서도 남의 집 “3년 농사”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한국 경제가 아직은 국제금융시장에 이해가 크게 걸리기 전이었다. 하지만 국제 자금의 이동이란 더 큰 차원에서 더 엄청난 파급효과가 장차 한국에도 닥쳐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5개월 후 내가 조사반으로 돌아가는 그해 8월부터 실감하게 된다.

바깥세상은 변하는데 국내 당국자들은 대응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1996년 늦가을의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확대는 참으로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고향 집으로 돌아갈 기대에 차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고깃덩어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 있어도 된다”고 얘기하는 꼴이었다. 사실 다른 나라에 생산성이 더 높아지고 있다는 상황은 즉각적인 대응에 나설 수 있는 일이 아니기도 하다.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교육 문화의 저력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실을 수긍하는 편이 낫지 이걸 뒤집으려고 억지 정책을 펴면 그것이 또 다른 후환이 된다.

그렇다면, 단순히 국제자금이 한국 등 이머징마켓을 떠나 미국으로 역류했기 때문에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인가.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지적하려고 한다. 이런 얘기를 할 때 매우 조심스러운 점이 있다.

외부요인이 1997년 IMF 위기에 한 몫 했다는 얘기가 자칫하면, 우리 내부의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줄 소지가 있는 것이다.

미국이 해외에 나가 있던 자금을 불러들였다고 해서 모든 나라에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이 아니다. 국제자금의 역류 말고도 한국 경제에는 지금도 답을 해야만 할 당시의 석연찮은 것들이 남아 있다. 무역수지 적자와 대마불사의 대출행태는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 여기에는 일부 답들이 나온 것이 있다. 그러나 1996년 한 해 동안 30개 가까운 투금사의 무더기 종금 전환에는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금융, 특히 은행자본과 산업자본 간의 차단벽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피가 나도록 체험한 경험은 기억이 희미해져 갈수록 누군가에 의해 지속적으로 도전받고 있다.

1997년 위기를 얘기할 때, 외부 요인도 있었음을 지적한다고 해서 우리 내부의 취약점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9년 전에 다른 매체를 통해 IMF 당시 겪은 일을 연재한 적이 있다. 23회에 걸쳐 지금에 비해서는 상당히 주마간산 격으로 이어가다 마지막 23회차에 이르러 내 나름대로 위기에 대한 진단을 제시해 보았다.

이 기사가 당시 포털의 대문에 걸려서 상당히 많은 독자들과 뜻깊은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관련기사: 정말로 김영삼이 IMF를 초래했을까 : 이 글을 연재한 매체가 지금은 사라져서 개인블로그에 옮겨놓았다.)

이번 시리즈 말미에 이와 비슷한 정리는 다시 한 번 할 것이다. 그런데 2007년 당시의 정리에서 빠져 있던 내용을 오늘 추가하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의 거시경제 전문가인 박종규 박사가 최근 금융논단을 통해 지적한 내용이 큰 도움이 됐다. 이 내용이 앞에서 소개한 “3년 후 미국 금리가 지금보다 14배나 될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기사에 담겨 있다.

9년 전에 한번 정리했던 내용이지만 지금 다시 쓰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우선 나부터 세월이 지난만큼 공부를 더 했다는 점이다. 또한 전문가들의 연구도 세월과 함께 더욱 깊게 진행됐다.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2007년만 해도 국내 전문가들에게 당시 국제 자금의 흐름을 지적하는 이야기를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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