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투금사의 무더기 종금사 전환 시절 이야기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15] 2000년 기자가 됐을 때, 종금사를 담당하는 후배가 종금협회가 있어서 취재 간다고 했다. 종금사라는 말에 옛날 생각이 나서 “종금사들이 아직 남았어?” 물었더니 후배 얘기는 “그냥 D종금사에 몇 사람 오는 거”라고 대답했다.

1990년대 종금사라는 업종이 있었다. 한 때는 은행 다니던 사람마저 만류하는 부모님에게 “잘 모르시는 말씀 마시라”며 사표를 내고 종금사로 가려고 하는 경우도 많았을 정도로 잘 나갔다. 그랬던 곳이 1997년 외환위기에 일격을 맞고 업종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1990년대 들어설 때는 종금사, 즉 종합금융사보다는 투자금융사, 줄여서 투금사가 많았다.

종금사와 투금사 간의 중요한 차이는 외화영업이다. 투금사는 외화영업을 못하지만 종금사로 ‘승격’되면 그게 가능해진다.

당시 미국 30년만기 국채 수익률은 5% 넘는 수준이었다. 1996년 4월1일 한국의 3년만기 회사채 금리는 11.28%다. 아직은 국채시장이 발달되기 전이다.

그러나 11.28%는 우량 회사채에 한한 얘기다. 대부분 은행 대출은 받으면 받을수록 남는다고 여기는 기업들은 회사채 발행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고, 이들 기업의 대출 금리는 이보다 훨씬 높았다고 봐야 한다. 금리가 높은데도 이들은 늘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늘 은행이나 종금사 투금사의 자금을 찾아다녔다.

만약 종금사가 돼서 외화영업이 가능해지면, 5%에 약간의 가산 금리를 얹어 달러 자금을 빌려와서 13~14%의 금리로 국내 기업에 빌려줄 수 있게 된다.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가 된다. 물론 이것은 종금업 시장이 포화상태가 되기 전 얘기라는 전제가 붙는다.

어떻든 막대한 내외 금리차는 투금사들이 종금사로 전환하는 것을 숙원사업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들은 종금사로 전환되는 날, 마치 은행이 된 것과도 같은 감격을 누리는 분위기였다.

지난 회에서 미국 국채 대란을 계기로 국제자금의 역류가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이 시리즈가 드디어 경제 금융 얘기를 하나보다 라고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죄송하지만, 아직은 1996년 봄이다. 이 글을 쓰는 내가 아직은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사무실에서도 겉돌고 있을 때다. 그런 수준에서 보고들은 얘기를 조금은 더 지속해야 한다.

산업은행 외화자금실은 국제영업부 소속의 한 부서였는데도 직원이 50명을 넘었다. 외화자금실장도 부장급인 1급이어서, 말하자면 부장 밑에 다른 부장이 있는 형태였다.

50명 넘는 인원 가운데 여성은 세 명 뿐이었다. 30명이 넘는 남자 행원들은 미혼이 특히 많았다. 나와 함께 해외석사 동기인 다른 친구도 미혼이었다. 은행이 정책적으로 외화자금실 딜링룸의 ‘기’를 살려주는 분위기도 있어서 대책 없는 총각들의 기세가 넘쳐났다.

요즘 나는 직장의 퇴근 후 회식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지만, 솔직하게 이 시절 우리 사무실의 잦은 회식에는 전혀 불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 자부심 등등한 사람들이 워낙 환상적으로 잘 놀았기 때문이다. 회식이 없으면 오늘의 프로그램은 뭐 없나 찾을 정도였고 진짜 할 일이 없으면 야간딜러들의 야식 때 공기밥 하나 청해서 일없이 밥을 먹고 퇴근하기도 했다.

그래도 앞날을 설계하는 차원에서 집단 ‘소개팅’을 갖기도 했다. ㄷ투금사 ‘미녀’들과의 소개팅은 그래서 만들어졌다. 앞서 D종금사와는 다른 곳이다. 휴게실 보드에 이 공고가 붙는 것을 보자마자 총알같이 내 이름을 올려놔서 선착순 참석권을 얻었다.

나가보니 진짜로 미녀들이었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ㄷ투금사”라고 언급을 했다가 그만 견제를 먹고 말았다.

한 여성이 “우린 ‘ㄷ종금사’입니다”라고 단호하게 우리를 훈계했다.

알고 보니 엊그제 투금사에서 종금사로 전환된 14개 회사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아마 회사에서 이제부터 투금이 아니라 종금사라는 정신 교육을 단단히 시킨 모양이다.

종금사로 전환된 투금사는 1996년까지 모두 24개에 달했고 종금사는 30개사에 달했다.

아무리 블루오션이라고 해도 너도나도 장사하겠다고 달려든다면 결과는 쓰라린 ‘치맥집의 교훈’을 얻을 뿐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종금사들이 치맥집의 교훈을 벗어나기 위해 국가 경제에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에서 종금사는 위기의 도화선과 같은 구실을 하게 된다.

여직원들에게 투금사란 말도 잊도록 정신교육을 시키며 기세등등하게 출범한 종금사들의 분위기가 한 달 후 어떠했는지는 한 달 쯤 후 이 업계의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는 계기가 있었다.

종금사들 앞에 펼쳐진 현실은 전혀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생애 최초 나름의 좌천을 경험한 얘기를 다음 회에서 할 차례다.

 

[16회] 다섯달 동안 겉돌더니 과연... 생애 최초 좌천

[14회] 1996년 3월 채권대란, 미국 딜러들만의 수난일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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