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16] 입행한지 석 달 만인 1995년 12월 갑자기 조사반에서 파생상품반으로 이동을 한 후엔 뜬구름 위를 걷는 듯한 은행생활이 이어졌다. 조사반에 있을 때는 생전 처음 접하는 경제 개념들을 하나씩 배울 수 있었다. 앞서 증권사에서 세미나를 다닐 때, 어떤 교수가 국제 자금 흐름을 설명하는 것을 보고 ‘나도 저런 거 하고 싶다’고 느꼈던 그런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파생상품반에서는 ‘내가 이런 일을 한다’라는 확실한 느낌을 받기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부족할수록 스스로 찾아다니며 공부도 했어야 맞는 일이었다. 이러고 지내다보면 어떻게 해결되겠지라는 타성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이다.

객관적으로 그 시절 스스로를 생각해보면, 다른 팀원들 눈에 좀 생각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쉽게 말해 별로 보탬이 안 되는 인력이었다.

스왑 거래를 한 뒤의 확인서 관리, 팩스 분류 같은 일 말고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여기서도 1주일짜리 연수를 하나 다녔다. 선릉역 근처에 있는 마사회 건물에 있던 파생상품 관련 학회가 진행하는 것이었다. 박찬호가 시카고 커브스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뒀다는 뉴스를 연수 마친 후 근처 식당에서 봤다.

나는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은행과 팀에는 좀 심각한 일이 하나 벌어졌다. 감사원 감사를 받게 된 것이다.

한 업체와의 파생상품 거래를 한 것이 문제가 됐다. 그 업체가 정말 수출 거래의 환율 변동 위험을 회피(헷지)하기 위해 한 게 아니라 투기적 목적으로 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은행은 관련 규정에 따라 이런 거래의 실수요증명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거래 하나하나에 전부 이런 실수요 증명을 한다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 업체는 굴지의 수출기업 가운데 하나였다.

1994~1995년에는 국제적으로 굵직한 파생상품 관련 사건들이 있었다. 은행의 관리 소홀로 인해 영국 여왕이 고객이던 베어링스 은행이 파산한 사건은 유명하다. 이런 일을 막자는 취지의 규정이 마련돼 있었지만 현실과는 좀 거리가 멀었다.

감사원 감사라는 것은 복무 기강 등을 중시한다던데 이번 감사는 특별히 한국은행 사람들 도움까지 받아가며 나왔다는 얘기도 돌았다. 해당 업체와 우리 팀이 같이 감사에 대처하는 상황이 됐다.

그 업체가 진짜로 투기적 목적으로 거래를 한 것인지 아닌지, 현실적으로 은행에서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국책은행이지만 여기서는 고객인 기업을 상대해 많은 파생상품 거래를 유치해 와야 하는 입장이었다. 산업은행의 저리 대출자금을 받으러 기업들이 은행을 상전 취급한다는 건 파생상품반이 속한 외화자금실과는 전혀 사정이 다른 얘기였다.

장사를 하는 파생상품반이 일일이 기업에게 ‘실수요 증명을 빠뜨리지 말고 확실히 첨부하시오’라고 큰 소리 칠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감사원의 지적 사항에 따라 해당업체로부터 부족한 서류를 받아와야 했다. 내가 이 심부름에 나섰다. 은행 다니는 동안 남의 사무실에 업무 차 방문한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이 곳 또한 ‘우리가 최고다’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내가 방문하자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은 나한테 “우리가 1년에 100억 달러를 수출하는 곳인데, 일일이 이런 거 좀 따지지 말라고 전해요”라고 푸념을 했다. 그런 얘기를 왜 나한테 부탁을 하나. 자기들도 감사 대상인데 직접 감사원에 대고 하지.

당시 우리 팀의 간부들에게 감사는 상당히 심각한 일이었다. 감사원에 대한 답신을 통해 실수요 증빙이 어려웠던 사정을 밝힌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에 따른 답신이 팩스를 통해 온 것을 내가 보게 됐다. 내용에 은행의 답신 내용을 언급하고 ‘그렇다면 관련 규정의 취지에 귀 은행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인지’라는 문구가 들어있었다. 이런 일에 아직 문외한인 내가 봐도 서릿발 같은 한마디란 생각이 들었다. 이 팩스를 차장에게 보고하니 차장의 표정은 심각하게 변했다. 그는 “이거 상황이 더 나빠졌는데”라고 한 마디 했다.

뉴스에서 보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당사자들이 조직적으로 은폐를 시도한다는 얘기를 많이 보게 되지만, 이 때 은행 사람들은 감사원이 등장하자 하나하나씩 마비된 사람처럼 움츠러들었다는 느낌이다. 마비된 사람들이란 조직적 은폐를 할 수 없다. 스스로 지키기만도 벅차다. 절대군주 같은 사주가 있는 기업이라면 “네가 나대신 벌을 받고 와라”라고 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공기업에는 있을 수 없는 얘기다. 당시 책임 선에 있던 분들은 이래서 더 고난을 겪었다. 누군가 나서서 있는 그대로 전달해 준다면 크게 도움 될 수도 있는 일인데, 국가 기관의 감사는 이런 순진한 호의가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시간은 이렇게 지나 어느덧 내가 이 팀에 온지 5개월쯤 된 어느 토요일이었다. 그 때는 토요일 오전 근무를 하고 있었다.

차장이 나를 불렀다.

국제영업부에서 외화자금실의 결제반에 있는 인력 하나를 데려가서 프런트의 인원 하나가 결제반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했다. 내가 그 자리로 갔으면 좋겠다고 차장이 말했다.

결제반은 앞서 내가 조사반에서 근무할 때 옆자리 있던 부서다. 거래가 끝난 후 정산 작업을 하는 백 오피스의 하나다. 외자실 내에서는 제일 선호도가 떨어지는 곳이다.

회계 관련 소양이 바닥수준인 나는 결제반에서 일해 보면 부족한 것을 많이 배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그런 생각을 속없이 드러내고 다닌 적도 많았다.

그러나 어찌됐든 누구나 오고 싶어하는 파생상품반에서 결제반으로 간다는 건 ‘좌천’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차장은 그래서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속으로 ‘겉돌면서 지내다가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럴 때 공연히 사람 돌변한 것처럼 보이는 걸 질색하며 살아와서 그냥 평소대로 토요일 근무를 했다.

오전 근무가 끝나갈 무렵, 차장이 다시 나를 불렀다. 상황이 바뀌어서 아까 했던 얘기는 그냥 없던 것으로 하자고 말했다.

이번에도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와, 평소 습관대로 286 컴퓨터와 흑백 허큘리스 모니터를 켜고 대학원 시절부터 ‘중독’스럽게 하던 삼국지1을 시작했다. 주말에는 이게 낙이었다. 게임을 하면서 아까 은행에서 벌어졌던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순간, 이렇게 됐으면 앞으로 차장이 나를 데리고 있기 곤란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 참에 결제반으로 옮겨가는 게 여러 사람도 편하겠다고 판단됐다.

월요일 출근했더니 차장이 또 불렀다.

암만해도 내가 결제반으로 가야 되겠다는 것이다. 주말에 그렇게 판단이 됐던 터이지만, 안가겠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도 했다. 더구나 평소 내가 이렇게 떠들고 다니기도 했던 일이 실현된 것이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제반에는 석 달 가량 있게 되는데, 과연 내가 기대했던 데로 상당히 많은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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