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17] 모두가 선망하는 파생상품반에서 일을 못해 결제반으로 자리를 옮겼다. 누군가는 결제반의 빈 자리를 채워야 하는데 30명 넘는 딜러 행원 가운데 내가 제일 적합하다는 판단을 윗분들이 내렸다.

결제반 업무에 내가 제일 적합하기 때문이 아닌 건 분명했다. 지금 하는 일에서 뺐을 때 공백이 제일 적을 사람이 나라는 윗분들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정말 심각한 건 당사자인 나도 이런 판단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거다.

파생상품반의 차장으로부터 송별 홍어 대접을 받았다. 청계천 공사 때문에 지금은 없어진 청석골이란 음식점이다. 종로 골목의 오래 된 한옥을 개조한 것인데 이런 음식점들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이 자리에는 차장이 구제한 또 다른 행원도 동석했다. 그는 본드 업무를 하다 상급자와 극심한 불화를 겪어 공중에 붕 뜬 처지가 되고 있었다. 자칫하면 일이 더 커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차장이 해당 팀과 협의를 거쳐 파생상품반의 대고객 영업 인력으로 받아들였다. 최일선 딜링 현장에 있다가 기업 고객들에게 마케팅하는 업무가 이 사람에게 인생의 후퇴 같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오히려 뜻 맞는 상사하고 일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렇게 폭풍처럼 지내는 사람들에 비하면 여전히 나의 처지는 호수같이 잔잔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과연 은행에서 내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느냐는 직장인 본연의 질문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담당 대리를 마음씨 좋은 사람들만 만났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이분들에게 송구한 마음도 갖고 있다.

결제반으로 옮기게 되자 담당책임자는 A대리였다. 그는 내 느낌에 산업은행 전신인 ‘식산은행’의 혼을 지키는 마지막 수호자 같았다. 지금까지 마음씨 좋은 대리들과는 종류가 다른 사람임을 첫날 깨달았다. 이름이 아닌 익명을 쓰니 뭔가 악연을 가진 사람인 모양이라는 오해는 없기를 당부 드린다. A도 그의 이니셜과 무관하다.

나는 그가 보여준 철저한 자기 관리를 존중한다. 그러나 글쓴이를 다소 좀 ‘갈군’ 인물로 등장하다보니 혹시 ‘악역’으로 보일까 해서 익명을 쓸 뿐이다.

A대리는 그전부터 예사롭지 않은 사람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당시는 김영삼 문민정부 때다. 한국 사회 특성에 대통령 출신 지역이 어디냐가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국제 부서같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에는 그 지역 말투를 쓰는 사람이 가득해진다.

내가 산업은행에 첫 출근 했을 때, A대리는 결제반이 아니라 프런트에서 자금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 팀은 팀장부터 특히 지역색이 강했다. 그건 당시 외자실 누가 봐도 분명했다. 은행업무를 모르는 초심자인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A대리 또한 그 지역 출신이다.

그러다 연 초 인사에서 A대리가 결제반 책임자로 이동했다. 일종의 역이동이었다. 휴게실에 앉아있는 A대리에게 팀장이 단호한 말투로 “네가 선택한 것이니 뭐라 하지 마라”고 얘기하는 모습이 우연히 내 눈에 들어왔다.

A대리는 지역연고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뜻에 안 맞으면 남들 싫다는 곳이라도 자청해 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게 바로 내가 입행 후 처음으로 임자를 만난 원인이다. 프런트에서 결제반으로 왔다고 위로받을 생각도 말아야 했다. A대리는 자청해서 그런 선택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단 결제반 업무는 이전의 조사반 파생상품 때와 한 가지가 확실하게 달랐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빈틈이 없었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맡고 있는 외국통화간 거래(FX)의 슬립(전표) 묶음을 딜러가 들고 오면, 먼저 은행 내 거래에 등록을 하고 스위프트 시스템을 이용해 외국 은행들과의 자금 거래를 완료하는 것이다. 웬만한 외국 은행들의 8자 거래약칭은 자동적으로 외우게 됐다. FX 딜러 이승현 씨 – 한여름 에어컨 앞에서 양복입고 있던 그 사람이다. 원달러에서 이 때는 외국통화로 옮겨 있었다 - 는 “장경순 씨, 슬립이 부족하면 더 얘기하세요”라며 프런트로 이어지는 출구에서 나타나곤 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솔직한 얘기를 하자면, 나는 아침시간에 정신 못 차리는 단점이 있다. 통계학을 가르치신 지도교수, 기자되는 법을 가르치신 지금의 대표 모두 너무나 잘 알고 계셔서 숨길수도 없는 사실이다. 두 분 모두 이른 아침에 엄청나게 부지런한 분들이다.

그러나 나의 이 못된 습성부터 A대리에게 빌미가 됐다. 거기다 내가 하는 헛소리에는 헛소리 차원이 아닌 심각한 결격사유까지 섞여 있었다. 금융에 너무나도 무식한 것이다.

전표에 ‘대충’이라는 표시를 보고 “누가 은행에서 대충 숫자를 적어놔요”라고 키득거렸다. 그때 주위 사람들 표정이 바로 ‘당혹한 얼굴’임을 나중에 깨달았다. ‘대충’은 대손충당금의 약자였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한 사람에는 A대리도 포함됐다. 그 즉시로 나한테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이 인간은 정말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결의를 다졌을 것이다. 면접 때 김완정 부총재가 “당신같이 통계나 공부한 사람이 채권 장사에 대해 뭘 알겠어요?”라고 물었던 것이 빈 말은 아니었음을 보여준 사례다.

역설적으로는, 바로 이런 점이 나한테 결제반 근무가 많은 공부가 되는 이유였다. 은행의 자금 흐름 절차도 좀 더 이해하게 됐다.

처음 한 달 정도, 나는 결제업무의 ‘미스터 퍼펙트’였다. 사람이 수동 입력하는 업무에서 때로는 실수도 있게 마련인데 나는 단 한건의 실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켜보는 A대리는 속이 터졌던 모양이다. 슬립 묶음을 쥐고 엉성하게 넘기는 것부터 전혀 은행원 같지 않다는 지적도 나한테 했다. 그가 나한테 하는 얘기의 한줄 요약은 “아침에 허겁지겁 나타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일하는 모습까지 은행원 같은 데가 한군데도 없다”는 것이었다.

A대리의 지적이 사실 겉모습만 보고 하는 건 아니었다. 완벽한 건 좋지만 꾸물거리면서 일을 하다 은행 시스템에 거래 입력하는 일이 가끔 늦었다. 오후 4시까지 은행 전체의 자금을 맞춰야 하는 자금반에서는 그 때문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실무적 이유는 둘째 치고 우선 앉아있는 모습부터가 은행원이 아니라 금속공예가 같다는 점이 A대리의 주된 불만이었다. 바로 그런 점이 내가 은행에서 자리를 못 잡는 이유라는 것이다.

어느 날 나를 따로 불러 “은행원처럼 보이라”고 각별히 당부를 했다. 나는 특히 이 얘기가 ‘속도를 높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가 “실수가 안 나는 것도 좋지만”이라며 속도에 대한 주문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무에 속도를 높였다.

그 결과, 이틀 동안 합계 1억3000만 달러의 결제착오가 발생했다. ‘미스터 퍼펙트’는 저만치 날아갔다.

A대리의 일관된 면모는 여기에서 드러났다. 그는 이 실수에 대해서는 일체 지적을 하지 않았다. 결제반 책임자로서 그는 철저하게 반원들의 실수는 자신이 수습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제와 조사를 총괄하는 백오피스 차장의 질책이 있었다. 나를 조사반에 데리고 있다가 프런트로 보낸 후 다시 쫓겨 오는 모습을 보고 위로로 일관해 온 분이었다. 하지만 결제 착오가 나는데 한마디가 없을 수 없었다.

연이은 실수는 외화자금실이 속한 국제영업부 전체의 문제도 됐다. 어느 토요일 부부장이 외화자금실로 올라와서 결제반원들을 모아놓고 회의도 했다. 자아비판을 강요하는 그런 자리는 아니었고, 혹시 업무가 과중하냐는 등 고충을 한번 들어보자고 올라온 자리였다.

6500만 달러 실수가 이틀 연속 발생해 문제가 됐지만, 결제 업무의 실수로는 큰 편이 아니었다. 가끔은 우리도 상대방 외국은행들이 실수하는 것을 봐서 알기 때문이다.

스위스 쪽 은행으로 기억하는데 우리한테 보내는 돈의 동그라미 세 개를 지운 적도 있었다. 보내야 할 돈의 1000분의 1만 보낸 것이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해당 통화가 이탈리아 리라가 아니었나 한다. 당시에는 원화보다도 액면이 싼 이탈리아 리라, 터키 리라 등이 국제 금융시장에 있었다.

실수가 발생하면 바로 잡을 때까지 해당 금액의 일수에 따른 이자가 벌금이 된다. 6500만 달러의 착오이면 당시 미국 연방준비은행(Fed)의 연방기금금리(하루짜리 금리)를 5%로 봤을 때 하루에 8900 달러 정도가 된다.

외화자금실 50여명 중에 여직원이 세 명인데 그 가운데 두 명이 결제반에 있었다. 결제반의 분위기는 커다란 잔치가 벌어진 집의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 닮은 데가 있었다.

A대리는 내가 소속 반원이 된지 서너달 쯤 후 뉴욕 현지법인으로 발령났다. 그가 결제반 책임자를 맡은 것은 7개월 정도다. 이 기간은 나름 뜻을 품고 국제 딜링 업무에 뛰어든 그에게도 잠시 숨 고르는 기간이었을 듯하다. 뉴욕으로 떠나게 되면서 나한테 “결제반에서부터 은행에서의 내 위치를 찾으라”고 당부했다. 나도 그 때 다른 팀으로 다시 옮기게 되는 걸 아직 모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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