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18] 결제반으로 옮긴 지 며칠 안 돼 공짜 점심을 먹게 됐다.

종금사 사람들이 머니마켓 담당자들한테 점심 대접을 하는데 나도 끼게 된 것이다. 이 때 머니마켓 담당대리는 내가 최초 근무한 조사반의 책임자였던 신배근 대리다.

낄 자리는 아닌데, 신 대리가 좌천당한 나를 위로한다고 접대 오는 사람들한테 양해를 구해서 군입을 하나 추가한 것이다. 말하자면 같은 은행 사람들이 ‘갑’ 대접 받는 자리에 가게 됐다.

입행 후 식사접대를 받은 게 처음은 아니다. 조사반 시절, 로이터와 경쟁 관계에 있던 모 경제금융 통신매체가 저녁 식사 대접을 한 적이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군지원 단기사병으로 근무할 때도 이런 경험을 했었다. 조직위 인쇄 물량을 받으려는 서울 정부종합청사 인근의 인쇄업자들이 조직위 직원들한테 설렁탕 수육 대접하는데 덩달아 한 자리 끼기도 했었다.

아무리 ‘갑을’ 관계기로, 밥 먹는 자리에서까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저자세 말투를 쓰는 그런 분위기가 아닌 건 예전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산업은행 외화자금실을 찾아온 종금사 사람들의 분위기는 좀 달랐다. 고기대접 받은 사람으로 이런 얘기는 죄송하지만, 너무 자신을 낮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자리가 좀 서투른 사람들 같기도 했다.

나이도 대체적으로 우리 일행보다 더 많을 듯 했다. 홍보담당자들이 기자를 만날 때도 이렇게까지 어려워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한계에 도달한 종금시장의 포화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점심에 고기 구워 먹는 자리였지 양주나 다른 고급술까지 마시는 건 아니었다.

나로서는 종금사 사람들을 두 달 만에 만나는 것이다. 두 달 전에는 ㄷ종금사 여성들과 소개팅을 했었다. 그 때 우리 일행 중에 누가 말버릇대로 “ㄷ투금사”라고 했다가 한 여성으로부터 “우리는 ㄷ종금사”라는 일침을 들었다. ㄷ종금사를 비롯한 14개 투금사가 1996년 봄 종금사로 전환됐다.

이번에 고기를 사러온 종금사는 이들보다는 선발주자였다. 14개 종금사보다는 2년 정도 종금업에 먼저 진출했다. 종금사 진짜 좋던 시절의 꿀맛을 좀 본 곳이다.

이들은 종금업계 현황에 대한 한탄을 하면서 자신들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요즘 새로 전환한 종금사들 진짜 겁나요. 우리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채권인데 어떻게 그런 것도 알아내서 막 사들여요.”

이들은 “우리는 그런 채권은 겁나서 사지도 못해요”라고 말했다.

식사 대접하는 모습은 다소 어설퍼보였지만 이들이 한 얘기는 절대 잊을 수 없게 됐다. 국가의 운명이 두고두고 이 말을 곱씹어야하는 쪽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1995~1996년을 전후해 24개 투금사가 무더기로 종금사로 전환됐다. 종금사에게 산업은행 머니마켓 라인은 하늘의 젖줄을 쥐고 있는 존재로 보일 시기였다.

금리 5% 안팎인 달러자금은 산업은행이 빌려올 때는 가산 금리도 별로 높지 않았다. 그러나 원화시장에서는 1996년 5월말 3년 만기 회사채 금리가 11.36%였다. 내외금리차가 6% 포인트를 넘으니 달러자금만 확보하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종금사들이 달러 자금을 자체 조달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가산 금리를 논하기 이전에 아예 외국 금융기관들과 거래라인을 만들 수도 없었다. 대안이 산업은행이 마련한 외화자금을 빌리는 것이다.

그런데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도 한꺼번에 24개 종금사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는 옛날 말이었다. 앞서 소개한대로 투금사에서 종금사로 전환될 때 이들은 감개무량한 나머지 무의식에라도 투금사란 말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철저히 정신 무장을 했다. 그래서 우리가 소개팅에서 종금사 여성들에게 야단도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종금사가 된 후 현실은 익히 들어오던 선발 종금사들의 잘나가던 시절과 많이 달랐다. 아무리 황금시장이라도 대 여섯 개 있던 곳에 24개 회사가 한꺼번에 들어오면 자금의 수요와 공급 양쪽에서 문제가 생긴다. 종금업계가 조성할 수 있는 자금을 나눠가져야 할 곳이 5~6배 늘어나게 되고, 또 너도나도 기업에 돈을 제공한다고 덤벼드니 기업들은 별로 종금업계의 돈이 아쉽지 않게 된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동남아시아의 투기등급 장기채권이었던 것이다. 1990년대 동남아시아 국가의 이런 채권은 당연히 금리가 높았다. 단순히 예대 금리로만 따지면 더욱 남는 장사다.

그러나 금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채권에는 미지급, 즉 디폴트 리스크라는 것이 있다. 또한 자금의 수급에는 기간불일치의 리스크도 있다.

높은 이자를 주는 것은 그만큼 부도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자에 대한 보답이다. 아무리 이자가 높아도 부도가 한번 발생하면 그 투자는 그걸로 끝장이다. 1997년 한국에 앞서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부터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종금사라는 연결고리를 타고 외환위기는 한국으로 더욱 거세게 전염돼 왔다.

거기다 국제 자금시장에서 한국의 금융기관들이 조달하는 자금은 단기였다. 단기로 빌린 자금을 위험한 지역에 장기 투자한 것이다. 우리는 제3세계에 투자한 돈을 받을 때가 아직 안됐는데 선진국 은행들은 한국에 수개월 단위로 빌려주던 자금의 만기연장을 거부했다. 1997년 상황이다.

바로 다음해, 한국이 겪게 될 혹독한 현실이 나의 어느 날 하루 점심 밥상에서 무심하게 튀어나왔던 것이다.

이날 종금사 사람들은 요즘 인터넷 유행어로 ‘성지(앞날을 예측한다는 뜻)’같은 말들을 나에게 남겨놓았다.

하지만 그날의 일거리 때워 넘기는 걸로 소일하던 내 머릿속에는 깊게 생각해 볼 틈이 없었다. 저런 얘기는 내가 다시 프런트 돌아가도 재미있을 것 같지도 않고, 지금 당장은 저런 고상한 얘기보다 담당 대리가 사람 갈구는 게 더 시급한 현실이었다.

중요한 건, 프런트로 돌아가는 것도 별로 희망찬 미래같이 생각되지 않았다. 석 달 있어봤는데 조사반 시절 일이 손에 더 잡혔다. 조사반에서 쓰는 은행 특유 말투의 보고서도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기왕 석사까지 공부한 거 박사공부도 해야 여한이 없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석사를 졸업할 무렵엔 내가 별로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깨달았는데 은행 생활 1년에 그 생각이 희석이 되고 말았다.

개인적인 일상사에만 매달려 사니 우연한 기회에 앞날의 파란을 예고하는 말을 듣고도 그것을 알아차릴 혜안을 갖고 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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