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원들, 1996년 이례적인 노동쟁의에 나선 근본 이유는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19] 파생상품반에 있다가 결제반으로 옮겨갈 무렵 밥 먹는 자리에서 들은 얘기다. 1996년 당시 한국의 경제풍토를 그대로 보여주는 얘기다.

4대 재벌그룹 계열사 한 곳이 산업은행에 대출금을 중도상환하려고 했다. 은행의 부부장이 이 회사 임원에게 전화로 호통을 쳤다고 한다.

“당신네 그룹이 누구 덕택에 이렇게 컸는데. 중도상환하고 싶으면 그룹 전체 대출금 전부 상환하시오.” 은행의 인심을 잃어서 좋을 게 없는 기업의 입장이라 중도상환은 없던 일이 됐다.

밥 먹는 자리에서 나온 얘기일 뿐이다. 이 얘기를 어디까지 믿느냐는 당시 풍토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 시대라면, 당사자는 부끄러운 짓 했다고 감추기보다 자신의 무용담이라며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약간 과장을 해서라도 떠들고 다녔을 법한 얘기다.

산업은행 뿐만 아니라 다른 은행 어디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얘기다. 기업들이 은행사람들을 제일 꼴불견으로 여기는 게 저런 소리를 할 때다. “누구 덕으로 컸는데.”

1997년 외환위기 전에는 특히 서민들에게 은행 문턱이 높다는 불만이 많았다. 금리가 높은 것을 떠나 아예 ‘은행 돈은 기업들 것이니 서민들은 쳐다보지도 말라’는 분위기였다.

은행도 기업대출이 많아야 제대로 된 은행이지, 서민이나 상대하면 그건 은행도 아니라는 취급을 받았다. 이른바 ‘조상제한서’라는 은행 서열은 은행 창립 연도 순서지만 기업대출을 많이 하는 서열이기도 했다.

이런 풍토는 외환위기와 함께 완전 박살났다. 2000년대 초에는 기업대출을 은행 망치는 독약처럼 여겼다.

조상제한서는 모두 부실화된 기업 대출이 화근이 돼서 오늘날 은행권에서 간판이 사라졌다. 이들이 위세를 떨치던 무렵, 서민들과 애환을 같이하며 발이 닳도록 시장을 누빈 은행이 있다. ‘도시의 농협’이라던 국민은행이다. 탄탄한 소매영업 기반으로 국민은행은 2000년대 최고 은행으로 떠올랐다. 2001년 주택은행과 합병하기 전 국민은행은 이미 정상으로 떠올라 합병상대를 고르고 있었다.

신한은행과 하나은행은 ‘후발은행’으로 분류됐다. 후발은행이란 분류는 외환위기 발생 이후 우량은행으로 바뀌었다. 부실 기업대출이 적었기 때문이다.

후발은행들은 단계적으로 대형화되는 시대적 운명을 갖게 됐다. 우선 외환위기 직후 퇴출된 은행을 하나씩 받았다. 그리고 2002년에는 ‘조상제한서’를 하나씩 인수했다.

오늘날 4대 금융지주 가운데 우리금융과 농협을 제외한 신한과 하나는 이렇게 성장했다. 외환위기 이전 은행원들 모임에서는 둘 다 작은집 취급을 받던 곳들이다.

내가 산업은행에서 겉돌던 1996년 봄의 금융계 형편은 불과 몇 년 후 돌변할 미래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동네 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리면 은행 지점장 자리를 연단에 마련해 준다던 시절이다.

이 무렵, 은행에서는 색다른 일이 벌어졌다. 산업은행에서 보기 힘든 임금 투쟁이 벌어졌다.

1995년 말, 노조선거에서 강성 위원장이 탄생했다. 지금은 ‘신의 직장’이란 말을 흔히 해서 산업은행이 무슨 임금투쟁이냐 하겠지만, 당시는 상황이 달랐다.

은행도 많아서 34개나 되는데, 산업은행 임금이 32위였다고 한다. 이런 현실이 지속되더니 마침내 산업은행에서도 강성 노조가 등장하게 됐다. 이 때 노조 간부를 했던 사람이 외환위기 이후 금융산업노조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됐다.

파업에 앞서 준법투쟁의 단계에 따른 매뉴얼이 과장 이하 노조원들에게 전달됐다. 전부 짙은 파란색 티셔츠를 단체복으로 맞춰 입었다. 그런데 이 노동쟁의 유니폼에도 산업은행스런(?) 소극적 특징이 하나 들어갔다. 쟁의 구호가 한 줄 들어가기는 했는데 글씨가 너무 작았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저 사람들 쟁의중이구나’라고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산업은행 본점이 있던 종로와 관철동 일대 상권에서 산업은행의 엄청난 위력은 이 때 확인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일대가 전부 짙은 파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덮여버린 것이다. 글씨가 작아서 뭣 때문에 저렇게 입었는지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인근 건물의 관리인 아저씨는 지나가는 나한테 이렇게 물어봤다. “뭣 좀 물읍시다. 요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똑같은 옷만 입고 다녀요?”

오후 3시쯤 되면, 사무실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입시다”라고 선창했다. 휴게실에 우루루 모여 작은 집회를 갖고 해산했다. 나를 비롯한 결제반 사람들은 업무 특성 때문에 여기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각 사무실에서 이 쟁의 때문에 부장들과 행원들이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위 간부들도 상당수는 시대 추세에 따라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다고 본 모양이었다. 그러나 노조가 직접 주도하는 현장에서는 인사부 사람들과 약간의 마찰은 벌어졌다.

이 쟁의는 파업까지 가지 않고 노사합의로 종료됐다. 노사간 ‘전격적 합의’로 어느날 오후 갑자기 마무리됐다.

이 전격합의 때문에 이 일기장에 크게 기여를 하고 있는 모 씨는 그만 애매한 상황을 겪게 됐다. 합의가 되던 날 그는 출장을 나가 사무실을 비웠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어서 내일은 정상복 출근한다는 얘기를 나가 있는 사람들한테 일일이 전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음날, 출근과 점심시간 사람이 가득한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혼자서 단체복을 입은 사람이 됐다. 오르고 내리는 내내 바닥만 쳐다봤다고 한다.

쟁의는 큰 일없이 마무리 됐지만 산업은행 노조는 행원들을 결집하는 첫 번째 중요한 경험을 갖게 됐다. 불과 몇 달 뒤, 노동법 파동이 닥쳐와 금융노조가 가장 앞장서게 될 때, 산업은행 사람들도 전혀 뒤로 물러서지 않은 것은 이미 몇 달 전에 전열을 갖춰 놓았기 때문이다.

산업은행 사람들이 1996년 단체행동에 적극적 모습을 보인 것은 임금문제보다도 기형적 인원구조가 근본 원인이 됐다.

산업은행은 1991년 이후 몇 년 동안 신입행원을 200명 규모로 대폭 늘렸다. 원래 50명 안팎이었다. 이유는 소매금융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 방침은 은행 최고위층에 불미스런 일이 생기는 와중에 없던 것이 됐다. 그러나 갑자기 크게 늘린 인원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조만간 대리시험 대란이 올 것이란 우려도 많았다.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듯 대리 승진을 하고 나면 그 다음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계획 없이 갈팡질팡하는 정책 속에 은행의 인사대계가 꼬이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은행원 개개인에게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2008년 이후, 또 다시 소매금융과 정책금융을 한다고 멀쩡한 은행을 둘로 나눴다가 다시 합치고 예금 늘리겠다고 운용처도 없는 돈을 엄청난 이자를 주며 유치하던 모습을 보면 과연 1990년대 교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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