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20] 파생상품반에서 결제반으로 ‘좌천’된 것은 생활 자체에 크게 심기일전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까지는 목표 방향을 모르고 겉도는 날들이 지속됐다. 여러 직장에서 우대받으면서 취직한 기억이 스스로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방해하는 가운데서도 이렇게 회사 일이 손에 안 잡혀서는 앞으로 모든 날들이 대단히 흥미롭지 못하겠다는 불안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듯하다. 그런 탓인지 당시에 유행했던 노래들을 지금 다시 들으면 별로 반가운 느낌이 없고 뭔가 막연히 불안하던 기억이 다시 난다.

그래도 당장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니 하루하루 퇴근 후 재미난 일거리 없나 기웃거리며 지내다가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물론, 본점 근무하다 산간벽지의 지점으로 발령받은 정도의 좌천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으로 내 근무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되니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인생의 방향부터 제대로 찾아서 본격적인 노력을 해야지 일도 못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분들한테 아쉬운 소리나 하면서 지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진작부터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은행 내에서 무슨 일을 목표로 해야겠는지는 여전히 가늠할 수 없었다. 파생상품반도 통계학이나 확률과정 공부한 내용을 직무에 쓰는 현실도 아니니 굳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당장의 결론은 좀 엉뚱한 쪽으로 났다. 다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Ph.D. 레벨로 유학을 가려면 3년 전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갈 때보다 GRE 점수부터 높여야 했다. 그 때도 잠재력을 최대 발휘한 점수가 나왔다고 으쓱했었는데 이 점수를 더 높이려니 아주 씹어 먹을 듯이 GRE 단어 공부를 해야 된다고 판단이 됐다.

7시 전후해 퇴근을 하면 모교가 근처에 있어서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유학 공부에 상당히 몰두하게 됐다. 간혹 퇴근이 늦으면 고작 50분도 안 되는 공부 시간이 나는데도 이조차 거른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도 없었다.

개인의 생활에서 목표가 정해지니까 뜻밖에도 은행 근무자세 또한 중심을 잡게 됐다. 결제반 담당대리는 나에게 곰바우처럼 일한다고 구박을 하는 일이 잦았지만, 근무는 전보다는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저녁에 일없이 이사람 저사람 모임에 끼어들려는 습성도 사라졌다. 얼른 가서 단어 하나 더 외울 생각뿐이었다.

결제반 근무 3개월을 하면서 너무나 회계에 무식하던 나의 단점을 어느 정도는 보완할 수 있었다. 곧 여름 정기인사철이 오게 돼 있었다.

결제반의 직무는 일정 단계가 지나면 같은 일의 반복이 된다. 새롭게 배우는 정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줄어든다. 대개는 외화자금실에 처음 배치된 딜러가 프런트로 가기 전에 머무는 부서로 활용되고 있었다.

만약 이번 인사에서 이동을 안하면 최소 6개월은 결제반에 더 있어야 했다.

그 때, 결제반 옆에 있는 나의 맨 처음 소속팀인 조사반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생각해보면 조사반 있을 때는 파생상품반처럼 겉돌지는 않았다. 로이터와 텔러레이트를 뒤져서 그날그날 시장을 움직이는 뉴스를 찾는 것이 제법 할 만했다. 특히 미국 국채 시장을 매일 아침 20자 안팎으로 요약하는 일이 나한테는 정말 의미가 컸다. 이것은 기자가 된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다.

이 부서에서 내가 제대로 기여를 한다면 조사반이 제일 적합하다는 판단을 했다.

어느 날 아침, 사무실이 비교적 조용할 때 조사반장에게 접근했다.

“과장님, 유능한 인력 하나 안 써보시겠습니까?” 약간 농담 비슷하게 말을 꺼냈다. 이 때 조사반장은 고참 대리여서 과장의 직위를 갖고 있었다.

과장은 내가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을 알고는 “장경순 씨가 조사반에 온다면 나는 좋지”라고 대답했다. 그는 “잘 알겠다”며 윗분들에게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조사반장의 허락을 받았으니 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됐다. 결과가 날 때까지 결제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뿐이다. 또 몇 천만 달러 송금 실수를 해서 3층의 부부장님이 15층에 올라오는 일 없도록.

조사반 과장이 나를 조사반으로 영입하겠다는 얘기에는 약간의 반전 요소가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아직 몰랐다.

인사 결과를 보니, 감사하게도 내 희망사항이 받아들여져 조사반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결제반의 담당대리는 뉴욕현지법인으로 떠나게 됐다. 그는 나한테 조사반에서는 은행에서 자리를 잡는 계기를 찾으라고 조언했다.

자리를 옮기는 사람이 또 있었다. 조사반 과장이었다. 나를 조사반으로 데려오는 것을 환영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 또한 프런트의 한 부서로 옮겨갔다. 나는 “그 양반, 나 데리고 일하게 되니까 자기가 다른 데로 도망갔다”고 농을 쳤다.

은행 들어와서 내가 스스로 판단해 무슨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1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것은 내가 은행을 떠난 후에도 글 쓰는 사람이 되는 첫 번째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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