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21] 1997 외환위기에 대한 실제 얘기를 읽고자 하는 독자들은 이제부터 시리즈가 본론에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앞으로 벌어지게 되는 상황을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왜 저렇게 해석을 하는가에 대한 배경설명이 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 못하지만 1996년 8월, 조사반으로 복귀했다. 입행한지 10개월 만이고 맨 처음 조사반 떠난 지는 7개월쯤 된 시점이다.

나를 조사반으로 불러준 과장은 프런트 다른 데스크로 옮겼는데 후임자가 연수중이어서 아직 부임을 안했다. 당분간 행원 두 사람이 자율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사반을 지키고 있던 또 다른 행원은 이 시기 외화자금실에서 ‘기인’으로 잘 알려진 김형익 씨였다.

당시에는 없던 요즘 표현으로 대단한 ‘동안’인데 ‘꽃미남’류는 아니고 되게 순박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입행 때 그를 처음 봤을 때는 이런 인상 때문에 나이도 나보다 젊고 혹시 대학을 안 나왔나 했는데 알고 보니 서울대 법대 졸업자였다. 그런데 공부를 제일 잘한 과목은 수학이라는 게 그를 잘 아는 사람의 얘기였다. 나이도 나와 같았다.

그는 프런트에서의 딜링 경력도 많았기 때문에 그가 선임행원으로 있는 동안은 담당 대리가 공석이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이 때 내 입장은 이렇게 만으로 지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제반 생활 석 달 만에 조사반 근무를 자청하고 나왔다면 그만한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결제반이 싫어서 떠난 것밖에 안 되는 것이다.

아침에 작성하는 일보는 처음 이선호 씨와 근무할 때랑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그것은 그 시스템대로 돌아가는 일이다. 여기에 뭔가를 추가할 것이 없을까 살펴봤다.

처음 조사반 때와 다시 돌아왔을 때 경제지표 가운데 가장 크게 변한 것이 원달러환율이었다.

1995년 12월1일 조사반을 떠날 때 환율이 769.60원이다. 연말 재벌그룹 경제연구소는 “앞으로 1달러당 300원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보고서까지 썼다.

1996년 8월 초 돌아왔을 때 환율은 812~814원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전년도 연말 결산날 원달러 딜러 이성희 씨(현재 JP모건체이스 서울 지점장)가 “새해 되면 환율이 올라가요”라고 얘기하더니 그 말대로 됐나싶기도 했다. 이성희 씨는 통상적인 연초 수급상황을 말한 것이겠지만 돌아와 달라진 숫자를 보니 예사롭지 않게 해석됐다.

당장 내 수준에 비춰 국제 환율이나 미국 금리에 관해 글을 쓰기는 무리지만, 원달러환율에 대해서는 접근해 볼만하다고 여겼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때 원달러시장은 절대적으로 ‘당국의 시장안정 의지’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여기에 주초의 결제수요, 월말 네고(수출대금) 장세에 따른 등락이 지금과 달리 상당히 비중이 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가 금리를 올리거나 내리거나 서울의 외환시장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던 그런 시절이다. (사실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음 해 외환위기로 원화환율이 폭등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Fed의 금리인상에 따른 투자자금의 미국 집중이다.)

조사반의 보고서가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경로는 인편과 팩스 두가지였다. 이메일은 입행하기 전 미국 학교에서는 일상으로 썼지만 은행에서는 이메일 계정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인편은 보고서를 작성한 내가 직접 들고 외자실 간부들 책상과 8층 국제금융 담당 임원실에 돌리는 것이다. 팩스는 팩스의 동보 기능을 이용해 외자실과 거래관계인 150여개 기업에 돌렸다.

대충 일과를 마친 6시 무렵에 PC 앞에 앉아서 원달러 시장을 요약하는 보고서를 쓰기로 했는데, 이 일을 시작한 또 하나 이유가 있다.

아침에 쓰는 일보를 비롯해 월요일의 주보 등 각종 보고서의 관공서 형식이 참 재미없다고 느꼈다. 기본적으로 이런 관공서 형식을 갖춘 것도 쓰지만, 좀 더 편한 보고서는 쓰면 안되나.

미국에 있을 때, 밤 12시 넘어서 하는 ABC의 월드뉴스나우를 자주 봤다. 아마 1994년 심각한 북핵 위기 때문에 뉴스를 자꾸 보게 됐기 때문이 아닌가한다.

이 뉴스는 딱딱한 형식이 아니라 토크쇼하는 것 같은 가볍고 익살스런 분위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두 사람의 앵커가 진행하는데 한 사람이 월차나 휴가를 가면 그 사람 자리에 실물 크기의 자리 주인 사진을 세워놓았다. 어느 날은 스포츠 코너에서 그날의 경기 결과를 보여주는데

‘ Comets 9 : 0 Jupiter ’

라는 화면도 나왔다. 코메츠라는 원정팀이 주피터라는 홈팀을 9대0으로 완전히 때려눕혔다는 건데 무슨 종목인지 잠시 궁금했다. 그러나 이건 경기 결과가 아니라 그날 목성에 혜성이 9번 충돌했다는 과학 뉴스를 패러디 형식으로 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분위기를 가진 은행 보고서도 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일보처럼 의무적으로 써야하는 보고서를 이런 식으로 썼다가는 맨날 부장실로 불려갈 소지가 있으므로 꿈도 꾸면 안되지만, 내가 자발적으로 새롭게 일거리를 만드는 거라면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원달이 일기’다. 이것이 내가 글 쓰는 사람으로 들어서는 첫 계기가 됐다. 원달이는 원달러환율을 줄인 말이다.

은행 간부들은 처음에는 ‘저 녀석이 뭘 자꾸 이상한 걸 쓰는데 자청해서 하는 일이니 일단 두고 보자’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원달이 일기가 탄생한 한달 쯤 후에 포렉스 세미나가 열렸다. 외화자금실이 거래하는 기업 외환담당자들을 초청해 1박2일로 진행하는 야외 행사였다.

여기 참석한 고객들이 원달이 일기에 대해서 과분하게 좋은 평을 외자실 간부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거 오면 읽고 가려고 퇴근을 늦춘다고 말했다고 한다.

산업은행 사람들 듣기 좋으라고 기업들이 과찬을 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과찬만은 아닌 것을 실제 확인하게 됐다. 당시 시중은행의 딜링룸에 대학시절 동아리를 함께 다닌 사람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한테 전화를 했다. “요즘 산업은행 무슨 보고서가 있는데 기업들이 왜 우리는 그런 걸 안 쓰느냐고 요구한다”며 그게 무슨 보고서냐며 내게 물었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실장과 차장들로부터 스스로의 노력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다. 내 생각과 마찬가지로 이 분들도 그동안 외자실에서 겉도는 인력으로 떠돌더니 드디어 자기 존재를 굳히는 점을 더욱 반가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원달이 일기’가 대박상품이 돼서 이걸 계기로 내가 오늘날 기자가 된 것은 나중의 일이고, 당장 한국이 처한 현실은 심각한 것이었다. 심각한 걸 아무도 인식 못하니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원달이 일기’가 기업들의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그 때 서울 외환시장이 수난의 시기로 점점 끌려들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1달러당 300원에 대비하자던 환율이 800원 넘어 820원을 위협하다니... 당시 외환시장에 임하는 사람들의 인식틀을 완전히 뒤집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외환위기의 전조였다. 그럼에도 지금 대한민국 어느 한 곳에서 뒤숭숭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외환시장 뿐이었다. 이들 또한 위기라고 여긴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820 뿐만 아니라 840, 860 등 20원 단위로 환율 저지선이 차례로 무너져 가는데도 1996년 내내 ‘국가 위기’는 아직도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22회] 경상수지 적자 많아서 국가 경제가 망한 1996년

[20회] 좌천된 부서에서 3개월만에 떠나려고 작정을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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