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22] 우리가 지금 초등학교라고 부르는 국민학교를 들어간 것은 1970년대 초다. 1학년 2학기때 학교에서 ‘한국적 민주주의 어쩌구’하는 표어 리본을 달고 다니게 하던 그런 시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이 의욕 넘치게 진행되고 있었다. 교내 복도 벽에 1982년이 되면 수출 100억 달러,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해 선진국이 된다는 희망이 크게 적혀 있었다.

숫자를 배운 후 경제를 알아가면서 계속 의문을 갖는 것이 있었다. 부채가 없어지지 않는 회사는 왜 안 망하나, 그리고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은 나라는 어떻게 안 망하는가였다.

2000년대 이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1997년까지 한국은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국가였다. 지금은 반대다. 무역수지, 즉 지금 용어로 상품수지 흑자를 많이 내서 미국으로부터 감시를 받을 정도가 됐다.

어른들에게 저런 의문을 질문하면, 그렇게 해서 경제가 돌아가는 게 좋다는 대답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상식의 힘은 어디가지 않는다. 파는 것보다 사는 게 더 많다면 그 가게는 끝내 어떻게 되겠는가. 경제 역시 이런 상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 바로 1996년이다.

들어오는 달러가 줄고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체감한 사람들은 원달러 딜러들이다. 환율이 미국 달러의 가격인 이상 이 또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1996년 8월, 9개월 만에 조사반으로 돌아갔을 때 769원이던 환율이 812원으로 올라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연초부터 7월까지 월별 경상적자는 매달 전년에 비해 말 할 수도 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1월 1995년의 12억 달러가 1996년 21억 달러로 늘더니, 특히 4월은 7억 달러에서 21억 달러로, 7월은 4억5000만 달러에서 20억 달러로 걷잡을 수 없이 늘고 있었다.

주요인은 1995년 뜻밖의 호황을 가져다 둔 반도체 수출의 부진이다. 일각에서는 1995년의 호황 자체가 ‘반도체 착시’였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 이런 착시 때문에 구조조정 의지가 사라졌다는 쓴 소리도 나오고 있다.

1996년의 연간 경상적자는 238억3000만 달러로 나중에 집계됐다. 사상 최대였다. 경제는 시간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므로 경제통계에서 ‘사상 최대’라는 말의 의미는 제한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1995년 경상적자 97억5000만 달러와 비교해보면 충격적인 적자 폭증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충격이 환율에 반영되고 있었다.

국민들은 아직 무역적자가 늘어난 것을 실생활에서 느끼지 못했지만, 외환시장은 이미 ‘계엄 상태’ 비슷했다. 1년 전 들여다보던 외환시장이 아니었다. 그 때는 외환당국이 원화의 지나친 절상을 막기 위해 아주 간간이 시장 개입을 했지만 1996년 8월은 전혀 달랐다.

원화의 급격한 절하를 막기 위한 개입이 끊임없이 계속됐다. 달러의 공급줄이 막힌 시장에서의 외환시장의 개입은 마치 바짝 마른 뙤약볕 모래사장에 호스로 물을 뿌리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당시 내가 원달러 일기에 썼던 표현이다.

내가 다시 일보를 쓰기 시작한 812원에 도달할 때까지도 무수한 공방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특히 800원을 둘러싼 공방이 어땠을지 약간은 상상이 된다. 이후의 820원 등 20원 단위 공방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무역수지 문제가 심상치 않다고 깨달은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재정경제원(지금의 기획재정부) 출입기자들이었다. 당시는 출입 언론사가 20여개에 불과했다. 재경원 출입 1진기자라면 전문가 못지않은 경제지표에 대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수시로 재경원 부총리의 기자회견장을 비롯한 곳곳에서 충돌을 빚었다. 기자들은 오늘만큼은 본심을 듣고 말겠다며 별렀지만 매번 재경원 관계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아직 우려할 수준 아니다”라는 식으로 빠져 나갔다. 때로는 기자회견장 분위기가 험악해 지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경제지표의 문제는, 그 폐해가 아직 국민이 체감할 정도가 아니라면 누구보다 앞장서 경고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로부터 ‘당신의 경고 때문에 오히려 투자정서가 얼어붙었다’는 반격을 초래하기 쉽다.

이렇게 해서 마구마구 불어나는 경상적자는 외환시장과 일부 기자들만 징후를 맡으면서 1996년 한 해가 저물어갔다.

사상 최대 경상적자는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과 면역력을 크게 저하시켰다. 다음해인 1997년 위기를 한국 경제가 방어력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맞이하게 된 것은 1996년의 경상수지 적자에서 비롯됐다.

경상적자가 늘어나면 환율을 거쳐 그 다음 영향을 받는 것이 외환보유액이다. 만약 외환당국이 1997년 11월 이후처럼 경상적자로 인해 폭등하는 환율을 방치했다면 외환보유액에는 이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율 급등이 물가 급등, 불안 조장,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상 처음 달성한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외환시장 개입을 단행하게 되면 외환보유액이 감소하게 된다. 한국의 외환당국은 다음해 외환보유액이 고갈될 때까지 시장개입을 지속했다.

내가 자청해서 쓰기 시작한 저녁 ‘원달러 일기’는 저녁 6~7시 경에 그날의 외환시장 소식을 담아 고객들에게 전달됐다. 이걸 쓰다 보니 오히려 결제반 있을 때보다 퇴근 후 영어 공부할 시간이 줄었다.

아침 일보나 주보에 비해 원달러 일기를 쓸 때 달라진 점이 하나 있었다. 상황에 맞는 단어가 흔히 쓰이는 것이 있다면 일보에는 바로 썼지만, 일기에는 어쩐지 와 닿지 않으면 기어이 다른 단어를 찾아서 채워 넣었다. 이 바람에 시간이 더 걸렸지만 어차피 퇴근 후여서 일정에 쫓길 일은 없었다. 당시 외화자금실에서 함께 근무하다 금융감독원으로 옮겨갔던 조윤숙 씨는 나의 뒷모습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가 전하는 나의 원달러 일기 쓰는 모습은 “뭘 쓰다가 상체가 옆으로 기울어져서 졸다가 또 쓴다”는 것이었다.

조사반 복귀는 비유하자면 치열한 820고지 전투에 참전한 딜러들의 모습을 전하는 종군기자 같았다. 전투보다 더 비슷한 장면이 있다면, 1980년대 대학 내 시위 장면이었다.

‘시위’라고 묘사한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시장 사람들은 당국이 그 어떤 방어선을 천명해도 그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국은 무슨 방법을 쓰든 820원대는 절대 허용하지 않을 기세를 시장개입을 통해 과시하고 있었다. 6월20일 800원선으로 후퇴한 이후 두 달 가까이 지켜지는 방어선이었다.

일본에 비해 한국의 시장개입은 상당히 수월했다. 그 때는 역외의 NDF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오로지 서울 외환시장만 ‘진압’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루 1억 달러면 매우 큰 개입이고 통상은 규모가 이에 못 미쳤다. 이에 비해 전 세계에서 거래되고 있는 엔화를 일본은행이 개입할 때는 하루 45억 달러가 동원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 시위 때 500여명 정도가 교문에 모이면 진압경찰은 최루탄이나 페퍼포그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시위학생이 1000명이 넘어가면 ‘지랄탄’으로 불리는 다탄두탄을 동원했다. 이 진압무기가 한번 발사되면 성균관대 명륜캠퍼스와 같은 작은 교정은 거의 전체가 연기에 뒤덮였다. 기세가 높던 학생들도 일단은 모두 학교 깊숙한 쪽으로 흩어졌다.

외환당국이 1억 달러 이상의 시장 개입을 단행한 날 모습은 ‘지랄탄’이 터진 교정과 비슷했다. 달러를 사겠다는 주문이 일거에 사라져 시장 전체가 잠잠해진다.

원달러 일기에 줄곧 쓴 표현도 ‘무분별한 외환투기 세력은 끝까지 추적 검거한다는 당국의 의지’와 같은 것들이었다. 이런 글이 고객사 외환담당자들의 흥미를 이끈 것은 당시 사회적 상황이 그럴만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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