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24] 쇼트트랙 경기에서 막판까지 경합을 펼치는 선수가 결승점에서 한 발을 먼저 내밀어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외환시장의 ‘종가 관리’다.

1996년 8월의 820원처럼 관건이 되는 환율 수준을 어떻게든 그날의 마감 시간에 지켜내는 방법으로 간간이 쓰였다. 주로 시장개입을 하는 외환당국이 쓰는 방법인데, 1996년 8월14일은 개입을 떠보는 시장 세력이 기습적으로 감행해 성공했다.

당시는 오후 4시 반까지 외환시장이 열렸다. 마감 무렵 대규모 달러 매수가 집중돼 환율이 올라갔다. 당국은 손쓸 틈도 없이 환율이 820원을 넘어가는 것을 보고 말았다. 특히 다음날은 광복절로 휴장하는 날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820원대 환율을 보게 된 딜러들은 복잡한 생각으로 휴일을 보내야 했다.

이것이 과연 투기세력들만의 달러 매집 때문인지, 아니면 외환당국마저 820원선에서 후퇴하는 것인지를 고민했다.

800원선이 무너진 것은 그해 6월20일이다. 800원을 한번 넘은 환율은 다시는 700원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국의 후퇴란 다시는 그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의미로도 통했다. 그렇다면 820원 이하도 마찬가지인가.

뒤숭숭한 가운데 시장이 다시 열린 8월16일은 샌드위치 근무일이었다. 다음날은 토요일. 당시는 주6일이기 때문에 휴일은 아니지만 외환시장을 비롯한 금융시장은 휴장했다.

이 시간은 한국이 선택의 고민을 하는 기간이 됐다. 대책 없이 급증하는 무역적자를 면하기 위해 원화절하, 즉 환율 상승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댓가가 동반한다. 사상 처음으로 달성한 국민소득 1만 달러를 포기해야 된다.

다음해 외환위기가 발생한 뒤엔, 한국은 강제적으로 이런 방법을 선택하게 됐다. 그러나 1996년의 선택은 다른 길이었다.

현재의 외환시장 교란을 투기세력에 의한 것으로 규정했다. “무분별한 환투기 세력은 엄단하겠다”는 방침에 후퇴는 없었다.

광복절이 지난 16일의 환율은 개장가부터 822원, 장중 고가는 826.1원까지 치솟았다. 이 환율이 마감 때는 819.7원이었다. 숫자만 봐도 만들어진 환율이고, 종가관리를 강하게 받은 환율이었다.

하루짜리 공휴일 전에 무슨 소란행위를 했는지 몰라도, 주말을 보내는 환율에 다시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당국의 의지가 확실히 전달되는 그런 숫자였다. 이 정도 숫자를 만들려면 수천만 달러 규모의 ‘통상적인 진압’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억 단위 ‘대규모 진압’이 동원됐다.

이런 날 나의 원달러 일기가 기록한 그래프는 가파르게 올라가던 환율이 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탄두탄 한발이 터지면서 교정 전체가 최루가스로 가득하고 연기가 걷히면 거세게 진압선으로 향하던 학생들이 모두 학교 뒤편으로 도망간 모습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그래프다. 학생들이 사라진 빈 공간에는 진압부대가 방패 벽을 단단히 쌓고 있는 그런 상황이다.

일단 거래는 모두 실종된다. 결제원에 걸려있던 모든 달러 매수주문을 막대한 시장 개입 물량이 소화하면서 환율을 가차 없이 아래로 치고 내려간 뒤다.

순간의 분위기로는 이보다도 더 떨어뜨릴 수 있다는 엄포가 전해진다. 누가 감히 달러를 사겠다고 나서기에는 너무나 살벌하다. 지금 달러를 샀다가 개입이 또 나와 환율이 5원 이상 떨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원달러 일기를 쓰던 나는 이러한 시장개입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기보다, 오히려 적극 두둔하는 뉘앙스로 시황을 전달했다는 자성을 남긴다.

읽는 사람은 시위 현장에 비유하는 나의 풍자가 ‘쓴 소리’를 했다고 여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때 나의 글은 ‘820원 환율은 너무 오른 것이니 내려가 마땅하다’는 결론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보고서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해관계도 작용했다고 밝힌다.

그 때 나는 퇴근 후에는 바로 모교의 도서관으로 직행해 GRE 단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두 번째 유학을 가려고 했다. 첫 번째 유학 중 환율이 750원 전후한 수준으로 낮아진 것이 제법 도움이 됐으니 두 번째도 그런 기대를 하게 됐다. 입학허가 자체에 학비 지원이 포함되는 것이지만 별도의 돈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나라 당국의 하는 일이 시장 원리에 어긋난다면 그에 따라 무슨 부작용들이 있을 수 있는지를 좀 더 살펴야 마땅했다. 그런 얘기를 쓰지는 못해도 알고는 있어야 했다. 알려고도 안한 것은 반갑지 않은 현실을 회피하려던 비겁한 자세라고 지금에 이르러 자성한다. 고객이 아닌 독자들에게 글을 쓰는 지금 더욱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지난 일이다.

이 때, 환율이 올라가는 일에 대해 외환위기 이후도 한동안 아무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다. 이 시리즈의 14회에서 1996년 3월 미국 국채시장의 대란을 소개했다.

거시경제 전문가인 한국금융연구원의 박종규 박사는 1994년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가 7차례에 걸쳐 금리를 3%포인트 인상한 것이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 한 원인이 됐음을 최근 그의 보고서에서 지적했다.

미국은 이 때, 1990년대 인터넷 혁명으로 본격적인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생산성이 급격히 높아져 더 많은 자금이 들어와도 거품 없는 성장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 세계에 나가 있던 자금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있어도 달러가 빠져나갈 상황에서 한국은 무역적자까지 겹쳤다. 네 자리 수 환율을 각오해야 할 마당에 800원 820원을 지키겠다고 외환보유액 곳간을 텅텅 비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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