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26] 그는 나와 같은 나이라고 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외화자금실장실을 들어서는데 노크도 없었고 한 손은 주머니에 있지 않았나 기억된다.

외화자금실장은 부장급으로 50세를 전후한 나이였다. 연배가 스무살은 더 위인 사람의 집무실에 이런 식으로 들어서는게 매우 이색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기자라고 했다.

어느 날, 이제 막 대리로 승진한 선배가 행원들을 비상계단으로 불러 모았다. 그는 출입기자 한 사람이 딜러들과 포커를 치자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대리는 만약 포커를 친다면 딜러들이 돈을 잃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잃으면 얼마를 잃어야 하느냐. 이래저래 뒷말이 좋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결론으로 “누구든 ‘기자와 친해보겠다’는 경솔한 자세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정중하게 사양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강조했다.

내가 ‘기자’ 직군의 사람들을 처음 구경한 것이 이와 같았다. 지금부터 20년 전의 얘기다.

4년 후에는 내가 기자가 됐다. 예전에 봤던 그런 구태의 ‘언론질’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취재원들에게 먼저 “밥 한번 먹읍시다”라는 얘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것은 그런 이유다. 약속 없으면 라면이든 칼국수든 그 날 따라 입맛이 나는 것을 마음껏 골라먹는 것을 낙으로 여겼다.

이것은 담당데스크들에게는 좀 죄송한 얘기다. 결백한 처신도 좋지만, 이런 식이면 듣는 것이 다른 기자들보다 적게 된다. 은행 공보담당자들은 가끔 일부 기자들의 몰상식한 행동을 겪은 후, 나를 만난 자리에서 부글부글 끓는 속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행동 하는 기자들은 늘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이렇다할 기사를 쓰는 적도 거의 없었다.

점심 문화는 은행 다닐 때도 꽤 중요한 ‘정치활동’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책상달력의 점심 약속 칸을 다 채우기 위해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며 살고 있었다.

내 성격에는 좀 안 맞는 문화였다. 약속 없으면 느긋하게 건너편 지하상가 음식 백화점에서 마음껏 먹고 싶은 것 고르면 되지 먹는걸 뭐 저렇게 심각하게 일거리 삼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런 성격이니 은행을 계속 다녔으면 남들 서 너 번 승진할 때 나는 아마 한 번도 할까 말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은행원들의 점심 문화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었다. 먼저 밥 먹자고 한 사람이 밥값을 냈다. 상하의 차이가 없었다. 아랫사람이라도 윗사람을 점심으로 초청할 때는 자기가 모시는 날로 여겼다.

반면 기자들이 취재원에게 “식사 한 번 합시다”라고 하면서 밥값도 자기가 냈다는 얘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나 또한 먼저 밥 먹자는 얘기만 안했을 뿐이지, 취재원들이 초청한 식사에서까지 내가 밥값을 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런 자리는 내가 취재를 하기보다,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나눠주고 올 때도 있었다.

내가 기자가 된 2000년 무렵, 언론계에는 대안언론 운동이 힘차게 퍼지고 있었다. 대안언론은 단순히 인터넷 기술의 보급에만 편승한 것은 아니다. 기자들의 자성이 더 큰 원동력이었다. 오마이뉴스가 등장한 것이 이 시기다.

내가 30대 중반의 뒤늦은 나이로 기자세계에 좀 더 편하게 진입할 수 있었던 것도 대안언론 운동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들끼리 밥 먹는 자리에서 타사의 동료 기자를 “구악”이라고 놀리고 농담하는 모습은 풍토가 변하는 시기 언론인들 생활의 한 단면이다.

위아래 몰라보고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지금도 좀 남아있는 기자들의 ‘직업병’이다. 대개의 직업병에는 그 직업이 불가피하게 그래야만 하는 측면이 약간 있기는 하다.

세상은 절대로 기자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으로부터 한걸음이라도 진실을 이끌어내려면 기자가 기존의 권위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 일부 기자들은 극도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행간에 진실을 전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자가 부당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종하지 말아야 했다. 이런 의식이 수습훈련을 마친 날 경찰서 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가야 하는 행태로 변형된 것은 아닌가 추측한다.

나는 경제신문의 ‘금융전문기자’라고 입문을 해서, 신입기자들이 받는 사회부 훈련을 받지 않았다. 수습기자들은 서울 시내 경찰서를 순회하면서 그 곳에서 형사들과 동고동락을 한다.

낮에 유혈이 낭자한 살인사건 현장을 보고 와서 저녁에는 빈속에 생간과 소주로 식사를 하는데 생간을 먹을 때 낮에 본 장면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은 신참 골탕 먹이기가 아니라 험악한 상황에서도 심리와 판단이 흔들리지 않는 훈련의 일환이다.

선배 언론인이 5년 전 쯤에 나에게 이런 훈련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리해 주셨다.

“인간은 죽을 때에도 유서에 거짓말을 쓰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허위를 뚫고 제대로 판단하기 위한 ‘멘탈 훈련’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과 언론을 둘러싼 환경이 변했는데도 과거 행태를 반복하다 문제가 되는 일들이 2000년부터 간간이 수면위로 등장했다. 예전에는 없던 일로 덮어지던 것들인데 기자도 이제 감시를 받는 직군이 되기 시작했다.

대단히 큰 언론사의 기자 한 사람이 경찰서에서 전통의 야료(?)를 부린다고 한 것이 상당히 선을 넘었다. 몇몇 대안언론 매체를 통해 이 사건이 보도되면서 이 무렵 활성화되기 시작한 뉴스댓글 공간을 뜨겁게 달궜다. 해당 언론사는 기자에게 징계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뀐 언론환경이 이렇게도 확인이 됐다.

외부에서 기자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기자들의 구태, 악습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세계를 들어와 보니 이 사람들의 장점도 실감하게 됐다. 그 장점은 뒤늦게 출발한 내가 따라잡으려고 해도 거리를 좁히기 힘든 것이다.

겨우 펜대 하나 잡을 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상당히 용감하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장점은 집요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자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본 다른 기자들, 대학 졸업과 함께 이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을 뜻한다.

또 한 가지 기자들의 장점은 판단이 빠르다는 것이다. 외환딜러들이 사상 초유의 부분 파업을 한 일이 있었다. 이것을 기자된 지 반년만인 내가 최초 보도를 했는데, 투기거래를 거부하고 실수요 거래만 하는 바람에 하루 거래량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등장하는 용어들이 기존의 경제 기사에도 등장한 적 없는 것들이었다.

종합지 선배 기자 한 사람이 나에게 와서 “이거 설명 한번 해보쇼”라고 요청했다. 뭐라고 뭐라고 내가 한참 설명했더니 선배는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네” 한 마디를 남기고 기사를 쓰러갔다. 나는 저렇게 단순히 해석할 문제는 아닌데 배가 산으로 간 기사를 쓰면 미안해서 어떡하나 걱정도 됐었다. 그런데 그 신문에 나온 기사를 읽어보니 내 최초 보도보다 훨씬 더 정리가 잘되고 한눈에 모든 상황이 파악됐다.

금융권 기자를 하면서 인상 깊었던 건 어떤 기자가 부당한 취재 장벽에 접하면 내 회사 남의 회사 가리지 않고 함께 따지는 모습이다.

이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내가 국회 취재를 처음 취재한 날 본의 아니게 툭 튀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방송국 여기자가 국회 경내에서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이유로 모 정당의 여성 대변인으로부터 항의를 받는데, 매우 어린 사람이어서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었다.

금융권 선배기자들한테 배운 원칙이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치솟았다. “뭐가 문젭니까”라고 끼어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때 내가 그 정당이 매우 싫어하는 진보매체 소속이었다. 싸움은 나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변질됐는데, 다른 기자들이 구경만 하고 있다가 상황이 끝나서야 몇몇 사람이 나한테 와서 첫인사를 청했다. 정치권 기자들은 기자도 정치성향으로 갈라지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가다 장동건의 1인 시위 현장을 발견해 연예부 기자들 틈에 섞여 취재한 적도 있다. 너무 기자들이 많아서 장동건 소속사 사람들이 8명씩 조를 나눠 인터뷰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뭣 하러 인원을 나누나 의아했는데, 저마다 질문을 한 번씩 해야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질문 안한다고 얘기하고 첫 그룹에 속해서 인터뷰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 기사를 빨리 쓸 수 있었다. 덕택에 포털에는 내 기사가 대문에 걸리기도 했다. 2006년 연예부 기자들은 인터뷰를 하면 누구나 다 한 번씩 질문을 하는 관행을 갖고 있던 모양이다. 취재영역마다 이렇게 약간씩 다른 모습을 갖고 있었다.

다음 회인 27회는 1997년 외환위기에서 잠시 벗어나서 산업은행의 현안을 다뤘다. 외환위기 당시 흐름을 따라가려는 독자들께서는 27회를 건너뛰어도 내용 전개에는 커다란 차질이 없다.

 

[27회] 새누리당의 12년 전 산업은행에 대한 문제 제기

[25회] 외환보유액 15억 달러 감소에 담긴 820 혈전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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