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 이동걸 산업은행장(가운데)이 지난 6월30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질의에 대답하고 있다. 이날 정무위는 8개 기관이 업무보고를 했지만 회의 대부분을 산업은행의 부실 문제를 추궁하는데 할애했다. 이 행장 오른쪽은 권선주 기업은행장, 이 행장의 뒤는 류희경 산업은행 수석부행장.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27] 이번 회는 1997년 외환위기 얘기가 아니라 2016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산업은행의 현안이다. 외환위기 당시 흐름을 따라가려는 독자들께서는 이번 회를 건너뛰고 다음 회를 읽어도 내용 전개에는 커다란 차질이 없다.

산업은행 문제는 현재 금융차원을 넘어 심각한 경제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국회 취재 중에 만난 산업은행의 옛 선배와 동료들은 나를 보자 “제발 좀 살게 좀 해줘”라는 울상까지 짓고 있었다.

언론의 집중포화 속에 본지 또한 매서운 비판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위에 있는 분들 책임을 묻자는 건데 무고한 행원들이야 별일 있겠소?”라고 내가 얘기를 하자 이들은 “분위기가 살벌하게 얼어붙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국책은행이 부실한 기업 끌어들여서 어설프게 재벌그룹 흉내 낸 결과가 이 지경이 됐다. 몇몇 사람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이 무고한 수천수만 명의 피해자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모피아’ 차관들이 산업은행 총재로 부임하던 시절이 차라리 더 낫다는 허탈한 쓴 소리도 나오고 있다.

모피아들을 제치고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더 전문성을 가진 게 아니었다. 대통령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본 사람들이 기자에게는 상당히 해괴하게 들리는 ‘KDB 금융그룹 회장’이라는 직함을 차지하더니 지금에 이르렀다. 유일하게 장관 출신으로 온 사람이 부임한 것도 좋은 소리 듣기 어렵다. “연봉을 올려서 모셔 와야 되느니” 따위 한심한 주장이 나온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잊지 않는다. 해괴한 ‘회장 놀이’는 그 무렵부터 시작됐다.

앞선 회에서 기자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1996년 흐름에서 벗어났었다. 내친 김에 지금의 산업은행에 대한 얘기도 좀 하기로 한다. 1996년 9월 820선이 무너진 외환시장은 한동안 이런 상태가 지속됐으니 잠시 미래 얘기로 넘어가보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산업은행을 어떻게 보는지를 처음 알게 된 건 2004년, 국회 취재를 시작할 때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다.

정권 뿐만 아니라 총선에서도 그 때의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넘는 승리를 거둔 17대 국회 개원 직후다.

국회의 권력은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 총선 결과에 따라 바뀐다. 이 변화는 의원들의 의석뿐만 아니라 상임위 전문위원들의 배치에도 영향을 준다. 몇몇 전문위원들은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는 정치 성향을 갖고 있었다. 어느 당 지지자인지 역력히 보인다는 뜻이다.

공부를 하는 목적에서, 경제를 담당하는 전문위원을 먼저 찾아갔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한나라당(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사람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속한 언론사는 진보성향이 강했다.

정치부 취재 현장에는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진보기자는 보수인사에게, 보수기자는 진보인사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을 때가 있다. 신뢰를 가지고 친해지는 것도 이런 경우가 많다.

서로 소속한 회사나 정파의 입장을 떠나 허심탄회하게 한마디 건네주는 말에 당장의 정파논리를 초월한 장기적인 안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취재원들도 기자가 매체의 성향을 벗어나 정확한 한 줄을 썼을 때 엄청난 신뢰를 갖게 된다.

보수 성향의 전문위원이 나와의 대화에서 맨 마지막에 한 얘기는 “산업은행이 구조조정 회사처럼 된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이것저것 부실한 기업들은 전부 산업은행 울타리에 집어넣어서 정권의 입맛대로 처리하려는 것은 절대로 살 기업 살리고 죽일 기업 죽이는 구조조정의 모범이 아니라는 지적이었다.

산업은행을 다녀 본 사람으로 이런 문제 제기를 접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당시에는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는 몰랐지만, 좀 더 접근을 해야 될 문제로 보였다. 앞으로 상임위를 취재하면서 이 전문위원을 가끔씩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전문위원들의 배치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 전문위원은 경제와 전혀 무관한 곳으로 옮겨갔다. 총선 결과에 따른 국회의 권력교체가 이렇게도 나타난 모양이었다.

한나라당 의원들도 비슷한 논리를 적극적으로 펼치며 정부를 감시하고 있었다. 국가보안법이나 사립학교법 같은 정치 사회 이슈가 국회를 전부 덮어버리기 전인 17대 국회 초기에는 국회의원들이 경제이슈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국회의원, 특히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이 산업은행과 관련해 처음으로 치열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은 사모펀드(PEF) 도입 때다. 산업은행 문제의 연장선이 됐다.

결과적으로 PEF는 당시 500~700이던 종합주가지수를 오늘날의 2000선으로 올리도록 주식투자기반을 확충하는데 한몫을 했다. 그러나 결과가 좋다고 해서 야당마저 칭송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야당의 날카로운 문제제기가 있어야 시행착오 전에 문제를 고칠 수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PEF에서 경계한 것은 특히 산업은행이 편법으로 부실기업을 처리하거나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을 인수하는 것이다. 우리은행 민영화 방법도 문제가 됐다.

산업은행이 PEF를 통해 우리은행을 인수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의원들은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보장을 요구했다.

이를 다루는 상임위원회는 재정경제위원회, 지금의 기획재정위원회로 3선의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현 새누리당 6선의원)이 위원장이었다. 이날따라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출석을 못해 김광림 차관(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부총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김무성 의원은 야당 상임위원장이지만 이헌재 경제부총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편의와 예우를 하고 있었다. 반면, 김광림 차관이 대참하는 날에는 특이하게 평소보다 훨씬 더 깐깐하게 같은 법안도 이것저것 따지고 묻는 때가 많았다. 소설에서 훗날 동료 의원이 될 것을 암시하는 복선을 넣는 듯한 장면이었다.

위원장 입장에서 한나라당 소속을 떠나 의원들이 산업은행의 편법 우리은행 인수를 막아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을 무시할 수도 없기는 했다.

그러나 모처럼 법을 만드는 정부는 국회 의사록에 훗날 족쇄가 될 수 있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김광림 차관이 “그런 우려가 없도록 충분히 검토하겠다”는 발언을 거듭했다.

김무성 위원장이 “차관은 왜 자꾸 검토하겠다는 발언만 해요”라고 1차 경고를 날렸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지속적 문제 제기에 따라 김무성 위원장이 “PEF로 우리은행을 편법 민영화 안하겠다는 보장을 하라”고 요구했다.

김 차관이 “그런 계획은 없지만, 앞으로 일을 미리 차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자 김 위원장은 “그런 식이면 법통과 안 시킵니다”하면서 고개마저 홱 돌려버렸다.

이렇게 해서 PEF가 통과됐다. 이날 현장에는 초선인 이종구 이혜훈 그리고 최경환 의원도 상임위 소속의원으로 논쟁의 선봉에 나서고 있었다.

누구보다 날카롭게 산업은행 구조조정 권력의 남용을 감시 질타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재 9년째 집권중인 정당의 정치인들이다. 한 사람은 절체절명의 시기에 경제부총리까지 지냈다.

그런 사람들이 집권했는데 오히려 산업은행은 오늘날 부실깡통이 돼 버렸다. 급하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서 채우게 만들기까지 했다.

야당일 때, 그렇게 똑똑하고 안목이 깊던 사람들인데 왜 자신들이 살림을 맡았을 때 이 지경이 되는가.

거대정당에게 가장 치명적인 평가 가운데 하나는 ‘야당일 때 국가에 더 기여한다’는 것이다. 산업은행 문제는 새누리당에게 이런 지적을 던지고 있는 경제 문제 가운데 하나다.

머리도 좋고 배운 것도 많은 사람들인데 엉뚱한 실천으로 일을 망치는 경우는 대개 인맥이 엮인 경우다. 전문가를 보내야 할 자리에 ‘내 사람’을 보내다가 그르치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캠프에 상대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 국정 관리에는 상당히 해악이 된다는 얘기가 많다. 무수한 사람들을 다 보상하려면 전문성을 따질 겨를이 없다고 한다. 산업은행도 이에 해당하는 경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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