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원 환율은 사라지면서 글 쓰기 인생을 남겨줬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28] 1995년 9월, 처음 산업은행 입행했을 때 내가 속으로 다짐한 것은 절대로 재수 없는 유학생이란 소리를 듣는 일은 없을 것이란 점이다.

나는 스스로 ‘전통적’인 사람임을 자처해 왔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여름 학기까지 포함해 강의를 들었지만 수업시간에 반바지를 입고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여기는 11월에도 반바지 입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원래 더위를 덜 타기도 했지만, 나서 자란 속성은 ‘학당에 나갈 때는 의관을 갖춰야 한다’는 의식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강의를 하는 수학과 그레그 브럼피엘 교수는 컨츄리 가수 윌리 넬슨 비슷한 중후한 인상을 가졌지만 그의 복장은 지금의 내가 여름철 집에서 입고 있는 내의 비슷한 T셔츠와 반바지였다. 강의 중 그는 신고 들어온 ‘쪼리’도 벗어놓고 맨발로 왔다 갔다 하며 강의를 했다. 이곳은 그런 ‘의관’에 연연하지 않는 ‘캘리포니아’ 정신을 가진 곳이다. 브럼피엘 교수는 외부 강사도 아니고 수학과에서 상당히 연륜이 높은 정교수였다.

맨발과 반바지 교수 수업에서도 ‘의관’을 갖추는 사람이 고향에 돌아와서 ‘압구정동 오렌지’같은 처신을 하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부심 높은 산업은행이 국가의 ‘국제화’ 시책에 부응해 역사에 없던 경력채용으로 석사 유학생을 뽑은 두 번째 기수다. 산업은행 전통의 ‘혼’을 가진 사람들은 못마땅하게 여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봤다.

실제로 어떤 차장 한 사람은 나의 입행 초 어느 날 나한테 느닷없이 “난 네가 잘 근무하고 다닐지 상당히 걱정 된다”고 말했다. 유난히 자신과 같은 출신 지역 사람들만 따지는 것으로 말이 많던 차장이었다.

석 달 후 나의 해외 석사 동기가 개인용무로 좀 늦게 근무를 시작한 후에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니, 그동안 내가 이런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하는 처신은 좀 했던 모양이다.

조사반에서 6개월은 있어야 한다는 당초 얘기와 달리 석 달 만에 파생상품반으로 옮겨간 것은 그 무렵 그 쪽에 자리가 비기도 했지만 한마디로 내가 ‘싸가지가 됐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원인이다.

그런데 처신만 잘하면 뭘 하나. 아무리 국책은행이라도 은행은 은행이다. 여러 가지 이자 수준의 차이를 보게 되면 돈을 벌 적절한 탐욕을 가지고 있어야 은행원의 기본 요건이 성립된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며 세상일을 논평하는 것은 은행원의 일이 아니다.

파생상품반에서 하는 일이 없어 반 년 만에 짐 싸서 결제반으로 옮겨간 것은 개인적으로 ‘군기교육대’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군기교육 교관 같은 담당대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6년 8월부터 조사반에서 다시 근무하게 된 것은 10여 개월의 ‘저니맨’ 생활 끝에 처음으로 내가 스스로 의지로 직무를 선택한 것이다. 원달러 일기는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그만한 노력과 결과도 보여야 한다는 판단에 자원해서 쓰기 시작했다. 세상일 논평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그나마 할 만한 은행일이 이것이었다.

미국에서 밤에 ABC 월드뉴스 나우를 보면서 뉴스를 저렇게 예능프로그램처럼 할 수도 있구나라면서 감탄했었다. 여유롭게 지켜봐야 촌철살인의 재치도 나오는 법이다.

1996년 9월10일, 원화환율이 822원으로 마감되면서 820선이 무너졌다. 이날 원달러 일기의 제목이 ‘벗겨진 모자와 님의 침묵’이었다.

서울 외환시장 마감 직후 우리 딜러 중 한 사람이 “○○ 믿고 일 못 하겠네”라고 개탄한 감정까지 다 반영하려고 한 것이 그런 제목이 됐다.

다음 날 출근하니 외자실 사람들이 그 제목을 언급하며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그 무렵에는 포렉스 세미나가 있었다. 포렉스 세미나는 외화자금실이 거래하는 기업의 외환담당자를 제주도와 같은 명소로 초청하는 행사였다.

말하자면, 산업은행이 기업들을 접대하는 것이다. 기업이 다른 은행도 아닌 산업은행을 접대하지 무슨 국책은행이 기업접대를 하냐며 생소하게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화자금실의 속성은 이런 ‘갑을’ 관계가 뒤집어졌다. 기업들이 우리 외자실에 주문을 많이 내줘야 실적을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국책은행답게 외환 관리를 잘 하고 전문가 수준의 분석 능력을 가졌는지 적극 홍보해야 했다.

물론, 초대돼서 오는 기업들이 은행을 정말로 ‘을’로 여기고 오는 강심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 사람들은 지금 상대하는 산업은행 외자실 직원이 언젠가는 기업금융 담당부서로 옮겨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듯했다. 그래서 외자실의 기업 접대 행사는 서로 간에 ‘을을’로 처신하는 훈훈한 장면이 많이 나왔다. 사람은 서로 겸손하면 아무 문제가 생길 일이 없다.

주말에 외화자금실장을 비롯한 대부분 간부들과 대고객 실무자들이 대거 포렉스 세미나를 떠나 사무실이 절반은 비는 듯 했다.

전에는 이런 날 아침 주인이 먹지 않는 요구르트를 모두 수거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스스로 의지로 일도 찾아 나서고 있는 마당이다. 부서의 중요한 행사에 맞춰 내 나름 할 일은 없는지, 임자 없는 요구르트들을 마시면서 생각해 봤다.

때는 외환시장에 파란이 닥치고 있는 때였다. 무너진 820선은 어디까지 밀려갈 것인가. 달러의 전 지구적인 강세는 파운드만 제외하고 모든 주요통화를 절하시키고 있었다. 엔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날은 ‘포렉스 세미나 스페셜 원달러 일기’로 ‘곽승상의 고뇌’를 다뤘다. 이 때 산업은행 원달러 딜러 가운데 한 사람이 곽씨 였다.
 

▲ 영화 ‘적벽대전’의 한 장면. /사진=뉴시스.


‘대형(大兄) 혼자 품안에 원화를 품고 들판에 가득한 적의 백만대군 사이를 종횡무진했다.

이를 바라보는 곽승상에게는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 강한 적을 이기려면 혼자만의 힘으로 안된다고 절감했다.

역시 필요한 것은 동남풍이었다. 바다 건너 동남편의 엔화부터 기운을 차려야 할 것이다.

동남풍이 살아난다면 곽 승상은 반도체를 앞세워 적의 본진을 섬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하는 소리였다. 미국이 IT 호황기를 맞아 3%이던 금리를 6%로 올리며 전 세계 투자자금의 미국 역류를 초래하고 있을 때다. 삼국지 적벽대전과 달리 ‘원달러 일기의 유비’는 쫄딱 망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다. ‘손권’ 노릇을 해야할 일본은 오히려 어려울 때 자금을 거둬갔을 뿐이다. 훗날의 결과에 비춰서 하는 얘기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 무렵 썼던 원달러 일기보다 특별히 더 잘 썼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늘도 저지선에 접근했다가 최초의 최루탄 격발과 함께 흩어져’ ‘무분별한 외환 투기 세력은 끝까지 추적 검거한다는 의지로’와 같이 생생한 시장 개입 현장을 전달할 때가 원달러 일기의 힘이 제일 넘쳐났다.

그래도 높은 분들이 사무실을 비웠을 때 절대 놀면서 일찍 퇴근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세미나 스페셜’을 작성하고 주말을 맞았다.

월요일 출근을 하니 김진건 실장께서 부임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내게 칭찬을 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고객들이 너도나도 원달러 일기를 호평했다는 것이다. 일부는 “평소에도 원달러 일기 보고 가려고 퇴근을 늦춘다”고 까지 말했다는 것이다.

산업은행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좋게 말한 점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은행에서의 ‘10개월’ 저니맨 생활은 이것으로 역전됐다. ‘써먹을 데를 알 수 없는 인력’에서 최소한 하나의 나만의 영역을 가지게 됐다. 특히 이것이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내 스스로 찾아서 만든 일이었다.

얼마 후에는 부부장 한 분이 일간지에 주간 외환코너를 기고하기 시작했다.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일도 내가 맡았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일이 여기에서 시작됐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29회] 평양성 탈환도 못한 외환시장의 '명나라 원군'

[27회] 새누리당의 12년 전 산업은행에 대한 문제 제기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