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30] 한국은행이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정하는 금리를 지금은 기준금리라고 부른다. 원래는 콜금리라고 불렀다.

콜금리란 간단히 말해 콜(Call) 자금에 붙이는 금리다. 그럼 콜자금은 무언가. 쉽게 말해 하루만 돈을 빌리는 이자다.

한국은행이 통화정책을 펴는 대상 금리는 사실 하루짜리 이자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 하루짜리 금리를 시작으로 기간별 가산금리 등이 붙으면서 전체 금리 체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세상에 누가 돈을 하루만 빌릴까. 있더라도 이것이 정책 목표가 될 만큼 흔하다는 것인가. 현실보다는 관리 목적의 가상 금리가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하루짜리인 콜금리는 사실 지금 한국은행의 통화정책보다도 더 유서가 깊다. 어쩌다 한번 거래가 있는 게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수도 없이 활발한 거래가 벌어진다. 특히 은행들 사이에서 그렇다.

은행은 예금을 받으면 이 돈을 대출 등으로 바로 활용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은행은 예금고객에게 이자만 지급해야 되는 손해를 본다. 예금 이자를 주는 것보다 약간 더 비싸게 대출 이자를 받는 것이 가장 간단한 은행 영업 구조다.

은행에서 그날 마감시간 현재 들어오고 나가는 자금이 딱 들어맞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금이 남거나 부족해진다. 그래서 남는 은행이 부족한 은행에 하루짜리 자금을 빌려주는 콜자금 시장이 생겼다. 이것이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대상이 된 것은 1998년이 돼서다.

지금은 중개기관과 컴퓨터 화면을 통해 거래가 이뤄지지만 1980년대까지도 이런 기술은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요즘 인터넷 은어로 마치 ‘현피를 뜨는’ 것처럼 은행원들이 직접 만나야 했다. 그래서 이 시대 콜자금 시장이라고 하면 명동의 커피숍을 생각하면 된다.

나도 얘기를 듣기만 했지 실제 본 적은 없다. 그 때는 카페라고 하면 대학생들이나 가는 곳이지 점잖은 어른의 고급 다방은 역시 커피숍이었다. 나름 고급스런 커피숍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은행 마감 시간을 전후해 신사복을 입은 은행원들이 우루루 들어왔다가 하루 일계를 다 맞춘 후 우루루 빠져나갔을 모습을 상상해보는데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은행을 들어간 1995년에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도 인터넷은 아직 은행업에 쓰지는 못했다. 요즘 학생들은 들어본 적도 없겠지만 초창기 인터넷의 넷스케이프를 어렴풋이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런 시대였다. 이거보다는 오히려 전화통화음과 함께 시작하는 PC통신이 더 보편적이었다. 이런 수단들은 은행 업무에는 아직 쓸 형편이 못 됐다.

그 대신 당시 은행들에는 로이터 RMDS라는 통신수단이 있었다. 은행원들만의 세계에서는 지금의 속도 빠른 인터넷에 크게 뒤지지 않는 기능을 제공했다. 국제 외환시장의 FX거래를 멀리 외국에 있는 딜러와도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니 국내 은행 간 거래는 더욱 막힐 것이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다는 것이다. 매달 요금 결제를 조사반의 내가 담당했는데 다우존스가 운영하는 텔러레이트 사용비까지 합쳐서 수 천 만원의 돈을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입행한 직후 조사반에서 일을 가르쳐주던 이선호 씨는 나보다 먼저 조사반을 떠나 머니마켓반으로 가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단기자금을 조달하고 운용하는 일을 맡았다.

외화자금실에 오기 전에도 그는 국제금융부 국제업무부 등 국제로 시작하는 명칭의 부서에 줄곧 있었다. 어디를 가나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조사보고서 작성이었다. 실제 거래를 하려고 은행 내 딜러시험에 응모해 합격했는데, 외화자금실에 와서도 한동안 조사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국제금융 거래 일선에 나가게 됐다. 이 때 머니마켓 시장을 구성한 것은 30여개의 시중은행과 지방은행에 15개의 종합금융사, 즉 종금사가 있었다.

몇 번 언급했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가 금리를 3%에서 6%로 올리던 시기다. Fed가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달러 자금을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남는 자금도 점차 미국으로 역류해가던 시기다.

이선호 씨가 머니마켓반으로 옮겨갔을 때는 한국의 신용등급 상승과 같은 그동안의 모든 호재가 끝물을 타고 있을 때다. 오랜 조사업무만 하다 그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전례 없는 생고생을 하게 된다.

머니마켓에서 그의 일과는 미국과 유럽은행 순례로 시작했다. 이것은 우선 돈을 마련해 오는 작업이었다. 지금과 달리 한국이 무역적자국으로 만성 달러 기근에 시달리던 때다. 달러는 구해만 오면 돈이 됐다. 필요한 것을 찾을수록 사람은 ‘을’의 처지가 되고 돈을 주는 외국계 은행은 ‘갑’이 됐다. 스웨덴의 한 은행이 가장 넉넉한 신용을 제공해줬다고 그는 기억한다.

독자들은 한번 돈을 빌리면 한동안, 예컨대 몇 달은 가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머니마켓이 단기자금 시장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단기는 길어야 1주일, 2주일이고 콜 자금, 즉 하루짜리 자금의 비중도 컸다.

하루짜리 자금이라면 곧 하루살이 자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을 매일 해야 했다.

‘구걸하는 을’의 업무가 끝나고 나면 이제 오전이 끝날 무렵부터는 돈을 뿌려주는 ‘갑’의 역할을 하는 시간이 됐다. 종금사들 뿐만 아니라 시중은행들도 산업은행의 외화자금이 필요했다. 이자부터 산업은행이 조달한 자금이 더 쌌다. 산업은행의 신용등급이 국가 신용등급과 같기 때문이었다.

특히 외화자금의 수요가 높아지는 시기가 오면 미리 예상해서 자금 운용계획을 짜서 머니마켓반의 수익을 늘리기도 했다. 국내 외화자금 머니마켓시장에서 산업은행은 절반 정도 비중을 차지했다.

최근 김영란법으로 인해 접대문화의 커다란 변화가 예상되고 있는데, 그런 법이 없던 당시는 종금사 사람들이 은행 외화자금 담당자들에게 고기를 사는 일은 매우 중요한 영업행위였다. 앞서 나도 덩달아 이런 자리 동석했던 일화를 독자들에게 전한 적이 있다.(18회. 종금사 사람들에게 고기 대접받으면서 들은 얘기)

월급 제대로 받는 은행 사람들이 고기 식사 못해서 안달할 사람은 절대 아니지만, 이런 자리는 종금사 사람들에게 얼굴 익힘의 자리가 됐다. 뉴욕 금융시장에서도 경매를 주관하는 사람은 먼저 시선이 만난 사람에게 우선권을 줘야하는 것이 불문율이라고 한다. 일단 얼굴부터 알아야 자금도 받을 것이니 종금사 사람들은 계속 은행 문을 노크했다.

그런데 1996년 머니마켓 시장은 국가적 비운의 씨앗을 키우고 있었다. 1주일, 2주일을 넘기기 힘든 머니마켓의 돈으로 3개월짜리 장기자금을 굴리고 있었던 것이다.

종금사들은 은행으로부터 단기자금을 받아서 기업들에게 3개월짜리 상대적인 장기자금을 빌려주고 있었다. 고기 먹는 자리에서 내가 종금사 사람한테 들은 것처럼 심지어 국내 기업에게 빌려주기가 어려워지자 러시아나 동남아시아의 이자 높은 채권을 사들이는 곳까지 있었다.

종금사들도 이런 하루살이 자금의 장기운용이 힘에 부치자 고통을 아예 은행에 맡기는 방법을 고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은행과 중장기 계약을 맺은 것이다. 계약을 맺고 나면 기간 동안 꾸준히 자금을 조달하는 고통은 은행의 몫이 됐다. 이런 고난도 영업을 해내려면 종금사가 은행 고위층과도 인적으로 인연이 두툼해야 했다.

오전에 외국 은행에 온갖 아양과 동냥을 통해 힘들게 자금을 구해 오면 오후 종금사에서 전화 한 통으로 그 돈을 몽땅 가져갈 때 머니마켓 딜러에게는 허탈감만 남았다.

하루살이 자금으로 3개월을 계속 ‘롤 오버’ ‘롤 오버’ 해대는 것이 국제적으로 티가 안날 수가 없었다.

내가 결제반에서 ‘정신교육’을 받고 있던 기간 어느 날 이선호 씨의 푸념이다.

“우리가 돈을 빌리는 게 사실은 종금사에서 쓰는 건 줄을 외국 은행들이 이제 알아서 산업은행 금리가 아니라 종금사 금리로 가져가라고 그런다.”

종금사 용도 자금에서 석연치 않은 느낌을 외국은행들이 외환위기 1년 전부터 느꼈던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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