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때마다 흔히 보는 한국은행의 시중자금 방출 모습.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31] 앞서 1996년 10월1일의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를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에 비유했다. 이여송의 명나라 원군은 평양성까지는 탈환하고 군세가 위축됐다. 그러나 1996년 외환시장의 ‘명나라 원군’은 820원 회복도 못하고 하루 만에 모든 기세가 사라졌다.

이 때 외환시장에는 ‘명나라 원군’이 도착하기 직전, 의병들의 거병과 비슷한 움직임도 있었다. 시기적으로는 주식한도 확대보다 먼저 소개했어야 하는 일인데, 당시 상황을 19년 지나 더듬다보니 시간순서에 다소 혼선이 생겼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랄 뿐이다.

조선 중후기의 지식인인 서포 김만중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켜낸 원인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나 명나라 원군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의병의 봉기에서 드러난 백성들의 충정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김만중에게서는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평가절하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이것은 제법 의미가 있는 부분이다. 김만중이 속한 서인은 율곡의 학풍을 숭상하는 사람들이다. 숙종조에 서인들의 최대 숙원이 율곡의 문묘 배향이었을 정도다. 그럼에도 대스승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논리는 이렇다.

한양 도성이 점령당한 상태에서도 백성들이 조선 왕실을 버리지 않은 것은 아직 민심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왜적의 침략 전에 10만 양병을 실시했다면 그 폐단이 민심이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서포 김만중의 지적에 나는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무엇보다 율곡의 10만 양병이 군사에 정통한 사람의 주장으로 보이지 않는다. 8도에 각 1만, 중앙에 기병 2만 병력을 양성한다는 것인데, 계획부터 일관된 지휘체계를 가진 군대로 보이지 않는다. 싸움은 숫자가 아니라 정예함으로 싸운다는 당시의 군사 교훈과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런 군대는 ‘우리도 이런 병력을 갖고 있다’는 허장성세용이 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전에서의 용맹함은 기대하기도 어렵다.

각도의 1만이란 방안이 조정의 부담을 덜 수는 있어도 8도 민심은 극심하게 피폐해질 것이 분명했다. 예종의 여진 정벌이나 효종의 북벌처럼 군대 양성은 단일하고 강력한 카리스마와 함께 통합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몇몇 영웅들의 일대기가 아닌 민심의 차원에서 국난을 극복했음을 강조하는 점에서 지식인으로서 서포의 안목이 더욱 돋보이기도 한다. 조선을 쳐들어온 왜군들 입장에서 도처의 의병 봉기는 예상도 못한 걸림돌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820원이 무너진 1996년 서울 외환시장에도 임진왜란 때 의병에 비유할 만한 존재가 하나 있었다.

수출이 부진하고 해외 투자금이 한국을 빠져나가는 ‘고차원적인’ 얘기들과 상관없는 이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림이다. 달러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이들에게는 역시 원화가 먼저 필요하다.

특히 추석과 같은 명절에 기업들은 원화가 더욱 필요해졌다. 명절 때는 직원들의 상여금 수요가 특히 늘어난다. 일부 기업에는 달러를 팔아서라도 원화자금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나한테 해준 사람은 당시 외화자금실의 원달러 반장이었던 문성진 과장이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외환보유액 발표 숫자도 유심히 살피고 공부하는 자세를 많이 보여준 분이다. 지금은 산업은행을 떠난 지 한참 됐다.

환율이 820원선을 뚫고 올라간 것은 나한테 개인적인 부담도 되는 일이었다. 다음 해 유학을 가보려고 밤에 도서관에 가서 단어 공부 하던 시절이다. 나의 원달러 일기가 시장 개입의 폐해에 대해 제대로 지적을 못한 건 일개 행원이란 신분의 제약 뿐만은 아니었다.

9월10일 822원을 기록한 후 17일에는 828.8원까지 올라갔다. 이 해 추석 연휴는 9월26~29일 이었다. 10월1일 외국인 주식자금 한도확대가 실시되기 직전이었다.

820선이 무너진 지 1주일 만에 830선을 위협한다면 다음번 격전지인 840선 방어도 보장 못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10월1일까지 어떻든 방어선을 지켜줄 요인이라면 추석자금용 원화수요 뿐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봉기는 매우 숭고한 것이지만, 국가의 한심함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국가가 백성들에게 도리를 못해서 마침내 백성들 스스로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된 것이다. 세금만 걷어가는 국가와 임금은 구차한 처지가 됐다.

1996년의 추석자금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상적인 수출도 이뤄지지 못하는데 국가는 환율 상승을 통한 새로운 균형점을 수용해야 한다는 안목도 갖추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직원들 보너스 줘야 되니 달러를 팔 수 밖에 없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참으로 구차해 보였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의 의병과 비유를 한 것이다.

그래도 ‘외환시장 의병’들의 활약은 제법 대단했다. 추석 연휴를 정확히 1주일을 남긴 9월19일 환율이 828.4원에서 823.9원으로 하락했다. 24일에는 820.2원으로 의병들만의 힘으로 ‘평양성 탈환’ 직전까지 갔다. 25일 821.1원을 기록하고 연휴를 맞았다.

하지만 ‘외환시장 의병’들에게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활동기간이 추석직전까지였던 것이다. 상여금이든 체불임금이든 급한 돈을 해결하고 난 기업들에게는 다시 달러가 더욱 귀중해졌다.

연휴가 끝난 9월30일 환율은 다시 826.0원으로 치솟았다. 이미 ‘의병’들은 모두 해산한 뒤였다. 이제 바랄 건 다음날의 외국인 주식자금 한도 확대였다. 이 자금은 5000억원에 그쳐 820선 탈환도 못하고 기력이 다했다는 것은 앞서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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