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32] 한국 정치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될 과제가 ‘집권 4년차’ 문제다. 대통령들이 임기 초와 다를 바 없는 국정 동력을 임기 후반까지 유지한다면 이런 문제가 생길 리 없다.

그러나 1987년 개헌 이래, 어느 대통령을 막론하고 당선 때 지지도를 퇴임할 때까지 유지한 사람이 여태 한 사람도 없다. 집권 5년째는 이미 여당과 야당의 유력한 차기 지도자가 등장해 이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1년 전인 4년차에는 그런 인물도 없다.

인기가 바닥을 헤매는 대통령과 함께 국정도 힘을 못 낸다. 국민들의 정책에 대한 반발도 커진다. 공무원들은 혹시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아무 일도 안하려는 ‘복지부동’ 차원을 지나 ‘낙지부동’의 단계로 접어든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나라에서 공통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속한 민주당은 지난 2014년의 총선에서 패배했다. 이 선거에서 상원의 다수당마저 공화당에 내줬다. 오바마 대통령이 남은 임기 2년 동안 레임덕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2년이 지난 현재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총선 패배 후 오히려 그의 인기가 오르기 시작했고 현재 진행 중인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은 클린턴 후보가 표를 모으는데 큰 힘이 되고 있다.

집권 후반기에 대통령의 국정 동력이 꼭 상실돼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현재 이 시리즈가 소개하고 있는 1996년 또한 대통령의 집권 4년차였다. 이 때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

집권 첫 해인 1993년에는 한국 정치에 깊은 상처를 남긴 하나회와 같은 군내 파벌을 일소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 상황도 호전돼 주가가 다시 1000을 넘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는 90%에 가까울 정도로 치솟았다.

하지만 경제의 동력이 차츰 사라져가고 개혁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정 지지층을 중심으로 점점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로 두 전직 대통령이 징역형을 살게 됐다. 또 오랜 시민운동가를 비롯한 새로운 인물들을 집권당에 영입했다. 이런 일들이 수도권 일대에서는 제법 큰 힘을 발휘해 4년차에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을 대거 여당으로 흡수했다.

그러나 여당의 오랜 기반이었던 지역에서 구세력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수도권의 압승이라는 보수정당 역사상 보기 드문 성과에도 불구하고 과반수 의석 달성에 실패했다.

이 선거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예전 집권세력들의 매뉴얼에 따르는 국정으로 복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 각계각층의 얘기를 두루두루 들어보겠다는 모습은 총선 전으로 끝이었다. 자신들의 집권기반에 충실하겠다는 국정 기조를 이어갔다.

이런 것들은 격변의 시기에서 국민적인 대통합을 이루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특히 그 해 한국은 정말로 심각한 경제 사회적 갈림길에 서 있었다. 새로운 정보기술 혁명으로 전 세계 산업의 근본 틀이 바뀌는 시기였다. 이에 따른 변화는 산업구조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간의 인간관계까지 바꾸는 것이었다.

만약 1996년이 집권 4년차가 아니라 새로운 정권의 1년차였다면 한국은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었을까?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물론,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된 후 ‘금 모으기’를 통해 외환위기를 극복한 사례를 우리 역사에 남겼다.

이것은 문제가 드디어 폭발하고 난 후의 상황이다. 아무리 국민적 지지도를 새롭게 끌어 모은 집권세력이라고 하더라도, 정확한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위기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에 대해서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집권하기 수 십 년 전부터 지적해 온 것들은 분명히 있다. 이런 지적이 정책으로 연결되려면 엄청난 반발과 제도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집권 후 이런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위기가 현실화돼, 아무도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다.

위기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개혁을 이룩해낼 수 있었는가는 또 다른 얘기라는 것이다.
 

▲ 김영삼 대통령이 1998년 ‘제심합력(齊心合力)’이라는 신년 휘호를 쓰고 있다. /사진=뉴시스, 국가기록원.


1997년의 외환위기를 초래한 모든 문제들은 이미 1996년 한국 경제에 존재하고 있었다. 사상 최대 경상수지 적자로 달러가 급속히 고갈돼 한국 경제의 면역력이 저하되고 있었다. 이 때 한 해 동안 30여개의 투자금융사를 종금사로 대거 전환시켜 이들이 한국의 외환사정을 기간불일치(미스매치)로 몰아가면서 폭약을 쌓아 놓았다. 여기에 수 십 년 묵은 고질병, 대기업들의 대출 경영은 한국 경제가 무너지는데 ‘한 방’이면 충분한 취약구조를 만들었다.

만약 요행히 한두 가지 문제만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서 1997년의 위기발생을 피해갔다면 그것이 과연 다행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외환위기는 국가적 불행이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서 재벌들의 문어발 경영을 어느 정도는 단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재벌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는 무모한 착각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없게 만들었다.

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위기만 피했다면, 수 년 후 또 다른 위기가 더욱 엄청난 심각성으로 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위기가 터지기 전에는 이를 바로잡을 만한 힘 있는 전문가그룹이 없다는 점. 제대로 보는 전문가는 있으되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은 자신의 지적이 올바른지 확신이 없다. 힘이 있는 사람은 전문가들의 충정어린 지적에 관심이 없고 이들을 자기 입맛에 맞는 소리만 내도록 강요한다. 이것은 지금도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다.

외환시장에서 환율이 9월10일 820원을 넘어간 후는 이쪽도 꽤 오래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830원을 넘느냐마느냐 하는 소동은 늘 있었지만, 820원 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파란이 덜한 편이었다.

집권 4년차인 1996년, 다음해 엄청난 위기의 분위기를 그나마 유일하게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 외환시장이다.

외환시장도 마치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환율은 상당히 오르긴 했지만.

다음 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한국 사회는 엉뚱한 사회적 대격돌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된다. 노동법 사태였다.

혹자는 이 사건이 다음해 외환위기와 대단히 관련이 높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나는 이 소동에 대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져버린 한국 경제의 마지막 방황이었을 뿐으로 여긴다.

정권이 밀어붙인 노동법이든, 야당이나 노동계가 주장한 노동법이든, 어느 쪽으로 결말났어도 이미 꼬일 대로 꼬인 한국의 외환사정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국제금융시장의 ‘하이에나’들은 한국을 이미 만찬 메뉴로 올려놓고 간보기를 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노동법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다음날, 한국 축구가 이란에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참패를 당했다. 아시안컵 8강전에서 한국은 이란에게 2대6으로 대패했다. 알리 다에이가 헤트트릭을 기록한 바로 그 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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