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34]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기억에 의지해서 20년 전 일을 쓸 때는 계절적 감각이나 특별한 일에 의지하게 된다.

노동법 파동으로 은행원들이 탑골공원에 집결할 때 대표로 참여하는 사람들한테 추운데 잘 다녀오라고 얘기했던 것을 근거로 12월이었음을 추측한다.

상당히 깊이 있는 국제 세미나가 제일은행 본점에서 열려 구경하고 온 적이 있다. 서울 종로에 있는 새로 지은 본점 건물이 꽤 좋았다는 점과 함께 난방시스템이 가동됐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

예전 뉴스 검색을 해 보니 과연 11월 15~16일에 열린 행사였다. 검색에 이용한 키워드는 ‘금융연구원 돈부시’였다.

금융연구원이 주최한 세미나에 국제금융의 석학인 루디거 돈부쉬 MIT 교수가 참석했던 행사다.

금융연구원의 행사는 가끔 전혀 통역 없이 영어로만 진행될 때가 있다. 이 행사도 통역이 없었다.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시대 유학 다녀온 사람들의 영어실력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햄버거 주문할 때는 점원이 묻는 게 많아서 쩔쩔매는데 수업시간에만 귀가 번쩍하는 정도다.

▲ 루디거 돈부쉬 MIT 교수. /사진=MIT 홈페이지.

통계학 수학 컴퓨터 수업을 들을 때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데, 이 교수들이 OHP를 들고 세미나를 진행하면 들리다 안들리다 하기 시작한다. 인터미션에 자기들끼리 과자 먹을 때 주고받는 얘기는 완전히 먹통이 돼서 잔잔하게 웃고만 있어야 된다.

아침에 은행 출근했는데 나한테 여기를 다녀오라는 지시가 와서 하루 종일 있다가 퇴근 무렵이 다 돼서 은행으로 돌아왔다.

1년 전 여의도 증권사에 한 달 있을 때, 옆의 회사 고객 설명회를 염탐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갔다가 눈치 없이 스스로 정체를 밝혀서 쫓겨난 이래 참 많은 세미나, 연수를 다녔다.

그러나 처음에는 누군가는 가야 되는데 사무실을 비울 사람이 없어서, 또는 금융을 너무 몰라서 라는 이유로 내가 갔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윗분들이 보니 조사반에서는 좀 제대로 하는 모양이고 깊이 있는 세미나여서 정보 탐색차원에서 보낸 것으로 생각됐다.

솔직하게 나는 그 때까지 돈부쉬가 누군지를 몰랐다. 아직까지도 이런 사람을 알고 있어야할 자리에 통계학이나 확률 석학들이 대신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돈부쉬가 오다니”라는 반응을 보여서 대단한 사람인줄 그 때 알았다.

박영철 고려대 명예교수가 그 때 금융연구원장이었다. 도착해보니 박 원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는데 나이 든 한국 사람이 유창한 영어를 하는 장면을 처음 봤다. 어려서 외국에서 배운 영어가 아니라 오로지 학습과 경험을 통해 갖춘 실력으로 보였다.

그 때까지는 영어 때문에 고생하는 한국 사람을 하도 많이 봐서 어른이 돼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건 불가능할 줄 알았었다. 박 원장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생소해서 막히는 분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국제 금융에서 1년 넘게 있다 보니 한국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영어 좀 한다고 티를 내려는 사람들을 간간이 봤다. 이런 사람들이 원어민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유머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5분을 얘기하면 서 너 번은 듣는 사람들에게 익살거리를 제공한다. 이런 해학과 여유는 ‘내가 영어 이 정도 한다’고 과시하려는 사람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조크라고 한다는 것이 억지로 웃어줄 수밖에 없는 저질 외설얘기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청중을 진짜로 가끔씩 웃겨가면서 영어하는 한국 성인으로 박영철 원장을 처음 보게 된 것이다. 듣고 있는 나는 어떤 것들은 남들이 웃는 것을 보고 ‘웃기는 얘기를 했구나’ 알아챘다.

그 때는 외환시장이 지금과 달라서, 원화환율의 변동 폭이 한국은행이 정하는 매매기준율에서 상하 2.25%로 제한돼 있었다. 박영철 원장은 자유 환율 변동을 제안한 논의 내용을 책자로 출판해달라고 요청하는 참석자들에게 “인쇄는 너무나 오래 시간이 걸려서 책자가 나올 때면 한국은 이미 완전한 자유 환율 변동국가가 돼 있을 것”이라고 말해 참석자들을 깔깔거리게 만들었다.

행사장에는 양복을 입은 젊은 남성들이 마이크 심부름 등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내가 못 알아들은 조크까지 바로 알아듣고 껄껄거리고 있었다. 금융연구원의 영어실력은 삼국지로 비유하자면, 모든 병졸이 관우 장비는 아니어도 관평 주창 정도의 무예를 하는 곳처럼 보였다.

오전의 내용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프랑스 여성의 발표였다. 그는 아시아 외환시장에 엔-블록이 형성돼 있지 않아서 불안정하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내가 매일 들여다보는 시장의 흐름과는 좀 다른 얘기였다.

당시는 원화와 엔화의 연동이 매우 높을 때였다. 수출 가격 경쟁력을 의식하는 한국의 외환당국은 원화와 엔화간의 환율을 달러대비 원화환율보다도 더 중시했다. 투자자들도 엔화환율을 원화환율의 기준선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원화만 봐도 상당히 확실한 엔-블록이 보이는데 발제자의 얘기는 달랐다.

쉬는 시간에 먼저 참석자 가운데 한명인 금융연구원의 이장영 박사에게 가서 질문을 했다. 이렇게 처음 인사를 나눈 이 박사와는 나중에 기자가 된 뒤 정말 여러 번 얘기를 나눴다. 이장영 박사 또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이었다고 동감했다.

당사자인 이 여성에게 가서 엔-블록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작은 반론을 제기해 봤는데, 그의 대답인즉, 이 정도로 엔-블록이라고 할 수 없다는 듯 했다.

20년 세월이 지난 지금의 아시아 외환시장에서 원화와 엔화는 대부분 등락이 엇갈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투자의지가 살아나 원화가 절상되면 엔화가 절하되고, 안전 자산인 엔화가 절상되면 원화가 절하되는 날이 많다. 그동안 너무나 엄청난 금융격변이 많아서 프랑스 여성의 선견지명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지만, 아무튼 상당히 의미 있는 지적이었다.

이날의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 한국의 당국자 한 사람이 발제자로 등장했다. 다른 참석자들은 오전부터 계속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가 발제도 하고 다른 사람의 발제 때는 토론도 벌였는데 이 당국자는 자신의 담당시간에 맞춰서 나타났다.

한국은행의 부장(지금의 국장)이었다. 그는 준비해 온 자료를 보면서 계속 읽었다. 한국의 외환시장 현황을 소개한 것으로 기억된다.

돈부쉬 교수는 다른 참석자에 비하면 말을 극히 아끼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가 한은 부장의 세션을 듣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환율 변동폭 등 자유 환율 변동을 규제하는 제도에 대해 돈부쉬 교수가 지적했다.

한은 부장은 “한국의 금융시장이 성숙하지 못해서 이런 제도를 유지해야 된다”고 짧게 대답했다.

돈부쉬 교수는 “그런 식으로 한다면 당신 나라의 딜러들은 영원히 성숙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반론을 이어갔다. 그런데 토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은 부장이 돈부쉬 교수의 반론에 미소를 지으면서 듣기만하고 끝났다.

김영삼 정부가 1993년 출범하면서 ‘세계화’를 강조해 은행권에서는 ‘기내식 많이 먹는 자리’가 선망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과연 은행원들의 실력이 얼마나 그런 ‘기내식’ 값을 할 준비가 돼 있었나. 나 또한 은행 국제금융 부서에 근무하면서 갖게 되는 의문이었고 상당히 유능한 후배 한 사람도 사무실의 현실에 대해 개탄하는 점이었다. 그것을 이날 당국자에게서도 확인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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