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승리' 후 할 일 없어진 미국이 이익집단에 휘둘리게 된다면

▲ 멕시코인들에게 험담을 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히스패닉 유권자들과의 정서적 유대를 강조하기 위해 타코를 먹고 있다. /사진=뉴시스, 트럼프 트위터.


[초이스경제 장경순 칼럼] 지금의 국제정세 속에서 미국의 위치는 춘추시대 진(晉)나라와 매우 흡사하다. 미국이 세계 최대 강국으로 힘을 얻은 과정, 그리고 미국이 고뇌를 더해가는 1990년대 이후 모습이 열국지 속 진의 모습 그대로다.

진은 분열된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과 다른 나라다.

진(晉)이 힘을 얻은 것은 주나라 왕실을 받드는 패업을 이룩하면서다. 주 왕실과 종친이기도 한 진은 문공이 제환공의 뒤를 이어 춘추5패의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면서 유일강국으로 발돋움했다. 패자(霸者)는 자체의 국력이 강하면서 제후들로부터 신망을 얻어 리더십을 갖춰야 가능한 것이다.

진이 제후들의 신뢰를 얻은 것은 남방의 호전적인 초나라로부터 중원의 주나라 왕실과 다른 제후들을 지키는 일을 앞장섰기 때문이다. 초는 본래 작위가 자작에 불과했지만, 주나라와 멀리 떨어져있어서 멋대로 왕호를 자칭하면서 중원의 질서에 맞섰다. 수시로 중원 국가들을 공격해 제후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초나라가 두려운 제후들은 자발적으로 진나라 중심의 동맹체제에 가담했다.

한국과 서방국가들이 20세기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무력 위협에 맞서 미국을 중심으로 동맹을 구축한 모습 그대로다.

단순히 군사적 세력 대결이 아니라 이념이 결부된 동맹이란 점에서 냉전시기 나토(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대결과 같다. 춘추시대는 공자가 강조한 주나라 천자 중심의 왕도 체제와, 이에 맞서려는 초나라 중심의 남방 체제의 대결이 지속됐다.

초나라가 점차 중화에 편입돼, 제후 본연의 위치를 찾아가자 마치 1991년 소련 붕괴와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더 이상 남방의 초가 중원을 노리지 않는데 제후들이 굳이 진나라를 중심으로 단결할 필요가 없어졌다.

진나라는 단호한 리더십을 과시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왕도를 어기는 정변이 발생할 때마다 군사 개입으로 패자의 위치를 입증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초나라로부터의 공포에서 벗어나자 자기도 정권 한 번 잡아보겠다는 자들이 속출하면서 천하에 분란이 그치지 않았다.

출병이 잦아진 진나라 군대의 피로가 심하게 누적됐다. 마침내 이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출병은 천천히, 철군은 신속하게’하는 전략까지 수립했다. 진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에 겁을 먹은 반군들이 스스로 해산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이러는 가운데 진나라 내부에서는 중요한 고비 때마다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이 점차 국가 권력의 대부분을 나눠 갖는 지경이 됐다. 내부 이해관계가 국가 권력을 잡아먹는 지경이 된 것이다. 6대 가문이 각축을 벌이다 한 씨와 위 씨, 조 씨가 남았다.

세 가문은 합의해서 진나라 제후를 축출하고 자신들이 나라를 나눠가졌다. 이것이 기원전 403년의 일로, 이 사건과 함께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춘추시대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원칙과도 같은 주나라 천자 중심의 왕도정치가 아직 존중받는 시기인 반면, 전국시대는 7개 국가가 모두 천자와 동급인 왕을 자처하면서 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올해 미국 대통령선거는 부동산 재벌로 공화당 후보가 된 도널드 트럼프에 관한 시비가 그치지 않고 있다.

미국 대통령의 기본 자질과 워낙 동떨어져 그의 패배가 기정사실인 것처럼 확실해 보였다가 최근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건강 문제가 제기되면서 다시 결과를 단정할 수는 없는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렇다고 트럼프의 승리가 유력해진 단계로 보기는 어렵다. 그동안 클린턴의 우세에 대해 미국 선거 특유의 경합을 강조하는 속성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문제는, 이번에 트럼프가 패배한다고 해서 이런 사람이 두 번 다시 안 나올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의 트럼프도 만약 과거의 언동을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선거 판세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와 노선을 함께 하는 미래의 후보가 좀 더 외교적이고 우아한 말투로 치장을 한다면 손쉽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음을 이번 선거가 보여주고 있다.

트럼프의 노선이라면, 자국 중심적인 외교에, 인권이나 민주주의 원칙을 후퇴시키면서 미국 내 막강한 이해집단의 이익에 치중하는 정치다. 이것이 교육수준이 낮은 대중그룹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는 현실이다. 동맹국들이 트럼프를 꺼린다는 점이 오히려 미국 유권자들에게 반발 표까지 가져다주고 있다. 트럼프로 인해 한국 역시 부자나라로 미국의 부를 갉아먹는 나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위대한 미국을 건설한 거대한 원칙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이해집단의 입김에 밀려날 지도 모른다.

진나라 문공은 기원전 632년 성복에서 초나라 군대를 물리치면서 이후 230년 지속되는 천하의 질서를 구축했다. 이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58~기원전 532년 재위한 평공 때다. 그의 아버지인 도공 때, 초나라와의 평화 공존체제가 마련됐다.

단순히 평공을 혼군으로만 비판하기보다는, 중원 수호자로서 역할을 다한 진나라 체제의 고뇌가 시작된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 세계를 위해서 짊어질 의무가 줄어들자, 진나라 내부 이해집단인 유력가문들이 권력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소련과의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이후, 미국은 중동을 중심으로 한 여러 곳에서의 분쟁에 개입했다. 이라크 전쟁은 전쟁의 성패여부도 불투명하지만, 미국의 공격 자체가 부당한 것이었다는 비난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인류 보편의 원칙을 앞세워 미국 내 이익집단을 조정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점차 의구심이 높아지고 있다. 끊이지 않고 총기 사고가 벌어지는데도 미국 정치권은 총기규제에 대한 논란만 지속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을 강대국으로 세운 건국 선조들이 이민자들임에도 멕시코 장벽을 세우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공화당 후보가 되고 말았다.

인류사에서 앞선 강대국들과 달리 미국은 비판에 관대하고 자기 개혁의 능력을 갖춰서 위상이 영원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이 보여주는 것은 이런 확신을 시들게 하고 있다. 진나라 패업을 무너뜨리기 시작한 진평공과 같은 국가지도자가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사고 있다.

기왕 열국지 얘기를 꺼낸 김에 사족에 해당하는 얘기도 부연한다.

진(晉)나라에 평공과 같은 군주가 나와 국력이 흔들리다 마침내 한, 위, 조로 갈라지자 그동안 진의 국력에 동쪽 진출이 막혀있던 진(秦)나라에 중원의 패업을 노려볼만한 기회가 찾아왔다. 오늘날 중국의 영어국명인 차이나(China)는 진(秦)에서 비롯됐다.

진(晋)이 한, 위, 조로 분할된 전국시대에 진(秦)은 효공, 혜문왕, 소양왕 등의 시대를 거쳐 진시황제 때에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미국을 춘추시대의 패자 진(晉)에 비유하는 구도에서 중국이 진(秦)과 비유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진(晉)이 남방의 오랑캐라는 초와 맞서고 있을 동안, 서방 오랑캐 취급을 받은 진(秦)은 중원에 대한 모든 불만을 접고 진(晉)의 편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덩샤오핑이 집권한 1980년 이후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이면서도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일관되게 미국의 편에 서서 냉전시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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