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37] 이번 회에서는 또 한 번 1996~1997년의 시간 흐름에서 벗어나는 얘기를 하기로 한다.

딴 얘기를 곁들이는 동안 독자들께서는 1996년의 뭐가 날듯 말듯 하면서 ‘설마 나겠어?’하는 상태가 그해 연말까지 마냥 이어지는 시간적 감각도 공유했으면 한다.

이 시리즈의 제목에서 보듯, 은행원 때 국난을 지켜보면서도 알아채지 못한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기자생활을 하고 있다. 원칙에 벗어난 방만함을 좌시하지 않고 역량 닿는 대로 반드시 한 마디는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너무나 앞서서 그만 생애 최대 오보를 낸 적이 있다. 시리즈의 37회를 써야 되는 이날로부터 정확하게 15년 전인 2001년 9월 18일이다. 그래서 이번 회에서 이 얘기를 남겨 놓고자 하는 것이다.

오보의 원인은 취재부족이 아니었다. 오히려 취재는 평균을 한참 앞섰다. 그런데 기자의 분수를 넘은 지나친 가치판단이 결부됐다. 그로인해 특종을 할 수도 있는 현장을 본 것이 오히려 오보를 내는 원인이 됐다.

지나친 가치판단이란, ‘절대로 무분별하게 돈을 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화를 마구 뿌려대다 1997년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이제 또 소수 이익집단만을 위해 원화를 뿌려댄다면 이 또한 훗날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란 생각이 가득했다.

그러나 기자의 1차 본분은 어디까지나 현장을 지켜보고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잘됐든 잘못됐든 그에 대한 판단과 대응을 우리 사회 내 다른 전문가들이 하는 것이다. 기자가 최종적 가치판단과 대응까지 하겠다고 덤벼든다면 충정은 가상할지 몰라도 주제넘은 일이 된다. 또한 이것이 지나치면 기자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한다. 그것을 15년 전 이날 제대로 경험해, 두고두고 글 쓰는 인생에서의 반면교사를 얻고 있다.

미국 뉴욕의 무역센터 빌딩과 국방부, 민항기 등이 일제히 공격을 받은 2001년 9.11 테러사태 직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연방기금금리를 0.5%포인트 전격 인하했다. 금리의 전격인하란 이처럼 예정된 회의가 아닌 날 결정될 때 쓸 수 있는 표현이다.

금융시장의 충격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장을 강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미국 Fed와 비슷한 조치를 한국은행이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됐다.

당시 한국은행을 이끌던 고(故) 전철환 총재는 절대 자신의 연임이나 일신상의 편의를 위해 주변 압력에 굴복하는 금리 인하를 할 분이 아니었다. 전 총재와 한국은행의 냉철한 판단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만큼, 기자 개인이 갖고 있는 ‘지나친 부양은 삼가야 하며, 하지도 않을 것’이란 믿음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9월18일 저녁의 한국은행은 뭔가 상당히 부산했다. 한국은행 상주 취재를 한 지 1년 3개월인데, 이런 분위기를 그냥 놔두고 평소 같은 퇴근을 할 정도 아둔하지는 않았다.

박철 부총재가 퇴근하지 않고 계속 집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그 방을 차원진 금융통화실장이 계속 출입하고 있었다. 이것을 지켜본 기자는 나와 종합지의 다른 여기자 뿐이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대로, 이날 저녁 기사 수정은 “부총재실을 금융통화실장이 계속 드나들었다”고만 썼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금융시장은 필요로 하는 모든 정보를 거의 다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미국흉내를 내면서 없는 날짜 비상회의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개인적인 주장이 판단을 흐렸다. 미국은 연 8회 하는 회의를 한국은 12번 하는데 무슨 임시 회의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드디어 퇴근 준비를 마치고 관용차에 오르는 박철 부총재를 따라 잡았다. 기어이 박 부총재로부터 “별도 회의 필요 없다”라는 대답을 이끌어내듯이 받아내고야 말았다. 다음날 생각해보니 이렇게 어리석게 물어보는데 박 부총재로서는 그리 거짓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충분히 수긍이 갔다. 지금은 기준금리로 바뀐 콜금리의 전격인하는 정말로 막중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남달리 늦게 남아서 잘못된 판단을 한 실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어이 이 대화내용을 심야 수정판에 넣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 한국은행 공보실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누구로부터의 전화인지 깨닫는 순간 어제 밤의 기사가 오보였으며 대망신을 겪게 됐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과연 전화 내용도 “곧 기자회견이 있을 테니 지금 한국은행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 한국은행의 2016년 기자회견 모습. /사진=뉴시스.


이렇게 엄청난 실수를 했을수록 즉시 데스크에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떠올랐다. 맞을 매는 빨리 맞는 게 나을 뿐만 아니라, 데스크가 빨리 알수록 수습하고 도울 수 있는 여지도 많아진다고 믿었다.

나의 데스크는 생전 처음 이른 새벽, 나로부터 전화보고를 받았다. 상황을 파악한 데스크로부터 질책은 단 한마디였다. “쓸데없는 기사는 써 가지고...”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이날 관련 기사를 어떤 구조로 얼마만큼 써야하느냐는 취재지시 뿐이었다. 이날 이후 다른 실수를 했더라도 이 때 일과 결부지어서 질책하는 일도 없었다.

질책이 없으시니 그만큼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이날 일을 거울삼아 더욱 성실하게 취재하고 근무하는 것만이 잘못을 조금이나마 만회하는 일이겠지만, 워낙 대망신을 겪었으니 이번 일 자체도 이대로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듣자하니 비상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때, 한국은행 집행부는 금융통화위원들에게 2001년 3분기 성장률이 0.5%로 추락할 수 있다고 겁을 줬다고 했다. 뭔가 차분하게 나온 대책이라기보다 분위기에 휩쓸려 금통위원들을 몰아붙인 정황이 농후했다.

그런데 한은의 정책은 지나치면 반드시 뒤탈이 나는 법이다. 모든 금융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만약 이날의 0.5%포인트 금리인하가 지나친 것이었다면, 나중에 채권시장에 대혼란을 초래할 것이란 예상이 들었다.

그때까지는 헛발질을 심하게 한 사람으로서 입 닫고 쥐죽은 듯 살기로 작정했다.

2011년 3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참으로 많은 소동을 초래한 경제지표다. 시초는 한국은행의 9월19일 비상 금통위 회의 보고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0.5%라는 예상 숫자가 나왔다. 한국경제에서 0으로 시작하는 모든 성장률은 ‘제로성장’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한은의 전격 금리인하보다 0.5% 성장 예상이 시장에 더 충격이었다. 지표금리인 3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은 전날의 4.9%에서 4.67%로 0.23%포인트나 떨어졌다.

만약 이날의 한은 정책이 과도한 것으로 판명된다면, 채권금리는 곧 이날 떨어진 만큼 무섭게 폭등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한국은행에 대해 크게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런 날이 온 다음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경제가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닌데 과도한 엄살로 시장에 혼란을 초래하고 선의의 피해자들을 만들어낸다면, 금융기자가 그런 일을 절대로 묵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과연, GDP는 자꾸 이곳저곳에서 ‘생각보다 높네’라는 식의 소식이 전해졌다. 유력 경제외신까지 오보 소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재정경제부(지금 기획재정부) 차관보급 인사 발언을 근거로 1.4%라고 보도했다.

예정된 발표 전날엔 국내 언론 한 곳이 1.8%라는 ‘엠바고 파기’ 보도를 했다. 한은의 11월22일 실제 발표는 후자인 국내 언론의 보도와 일치했다.

그러나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0.5%라던 성장률이 1.8%로 판명됐는데, 채권시장이 절대로 당국의 이런 헛발질을 용서할리 없었다. 한은이 금통위에 제로성장 보고를 한 것이 9월19일인데 어떻게 3분기 남은 열 하루동안 성장률이 1.8%로 대변신을 할 수 있을까.

아침 출근하면서 채권딜러들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과연 이날 시장은 완전 채권딜러들의 종말을 맛보고 있었다. 이날 지표금리는 5.68%에서 5.89%로 0.21%포인트 급등했다. 한은이 제로성장을 위협했던 날 폭락했던 0.23%포인트와 거의 비슷한 규모로 폭등했던 것이다.

이날 기사계획은 사실상 전날, 아니 두 달 전 대망신을 당하던 날 만들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면 톱부터 시작해서, 3면 해설기사 두 건 등 거의 특집을 하듯 ‘한국은행이 시장을 초주검 만들었다’는 기사들을 썼다.

지면 가득 한국은행을 질타하는 기사를 썼으니 도의상으로라도 저녁 가판 오기 전에 회사로 도망치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말썽 많은 3분기 GDP가 퇴근하려는 발목을 잡았다.

기자단의 엠바고 규정을 어기고, 시장 혼란을 초래한 매체에 대해 책임을 묻는 회의가 열렸던 것이다. 내신 외신까지 출입기자단 3분의 1은 되는 매체가 처벌대상이고 나머지 3분의 2가 ‘심판’을 내려야했다.

도망갈 생각만 가득했던 나는 별다른 얘기도 없이 앉아있다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기자실을 빠져나왔다. 과연 심난한 공보실장 뿐만 아니라 한은 부총재보 한 분까지 전화가 걸려왔다. GDP와 무관한 직무를 담당한 부총재보였는데 내게 전화를 한 것은 나하고 학연이 닿는 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고칠 기사면 애초에 쓰지를 않는다고 일침을 놓았지만, 제목의 ‘초주검’만큼은 다른 단어로 순화됐다. 제목은 취재기자가 아닌 데스크와 편집기자의 영역이니 내가 간여할 일은 아니었다.

엠바고 파기 뿐만 아니라 오보까지 겹쳤던 외신은 거의 석 달 가까운 출입금지 처벌을 받았다. 세 차례 금통위 회의 결과를 즉시 보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외신으로서는 치명적인 처벌이었다.

급기야 어느 날,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외국인 두 사람이 한국은행 기자실로 당시 기자단 간사였던 한국일보의 장인철 선배를 찾아왔다. 지사장 쯤은 되는 사람들 같았다. 천장이 트인 벽 너머 들리는 대화가 잔잔한 걸로 봐서는 외국인들 특유 “이런 불이익에 우리도 대응을...”하는 따위 당당한 자세가 아니라 선처를 바란다고 신신당부했던 모양이다.

다른 매체들 출입금지 처벌이 경감되는 것과 함께 해당 외신도 징계가 조기에 풀렸다.

 

[38회] 한국사에서 상대적으로 주목 못받는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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