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위기'는 1997년이 아니라 1996년에 이미 돌이키기 어려워졌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김영삼 대통령이 1996년 제주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앞선 1995년에 소득 1만달러를 달성하고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한국은 이제 선진국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오히려 뭔가가 잘 안풀린다는 분위기만 짙어졌다. 다음해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게 됐다.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38] 흔히 ‘IMF 위기’라고 불리는 국난은 정확히 말하면 ‘1997년 외환위기’다.

그런데 이 시리즈를 통해 나는 1997년만 잘 대처했다면 과연 한국이 위기를 피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미 1996년에 만사를 돌이키기 힘든 지경으로 몰아넣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다.

1996년 말, 노동법 파동으로 ‘넥타이부대’가 명동성당에서 진압경찰과 대치했지만, 노동법이 어떤 식으로 마련되더라도 이미 한국은 다음해 엄청난 파국을 피할 길이 없었을 것이란 추론이다.

‘IMF 위기’를 돌이켜보는데 있어서 1997년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1996년의 일들 역시 철저히 분석하지 않는다면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1997년은 위기가 뻔한 상황이어서 이 지경을 만든 국가 엘리트들이 함부로 큰소리치고 잘난 척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1996년은 이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근거 없는 자신감만 가득했다.

국가운영의 지엄함을 되새기는데 있어서 1996년을 돌이켜보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도 드물다. 무능한 국가 엘리트들이 어떤 미래를 가져오는지 불과 20년 전의 생생한 경험이다.

외환위기 전체를 원인과 결과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은 이 연재물의 말미에 해볼 예정이지만, 1996년의 여러 가지 일들을 소개한 지금 단계에서는 이 한 해를 우선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너무나 엄청난 국난을 만들어냈으면서도 그다지 많은 재조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때가 1996년이다.

하지만 한국은 당시 세계 11대 경제대국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큰 나라에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소리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각종 연구소에서 내는 자료의 귀퉁이에는 구조조정과 관련한 단어들이 한 번씩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신심(信心)’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쓰는 사람은 지적인 완벽함을 위해, 읽는 사람은 이런 개념도 알아는 둬야겠다는 차원에서 읽고 넘겼을 뿐이다.

만약에라도, 현실적 차원에서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려는 사람이 있었다면 두 마디로 대변되는 조직문화의 장벽을 넘기지 못했다.

“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 쓸모없는 고상한 토론만 하고 있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말 것이지 웬 말이 많아?”

이때까지 한국은 경제에 있어서는 큰 실패를 겪어보지 않은 나라다. 경제 당국이나 기업, 연구기관, 공기업 등 한국 경제를 담당하는 기관들은 기존의 권위에 이론의 힘으로 허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힘을 받을 수 없었다.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근본 간부라인에 변화가 불가피하고 그러면 크게 불이익을 받는 실세가 등장한다. 당장 나라가 망할 일도 없을 텐데 이런 평지풍파를 뭐하러 감수하나?

이렇게 해서 우리 스스로 문제를 살펴보고 개선할 시스템을 망가뜨렸다. 정말로 나라가 망할 지경이 돼서야 강제적으로 개혁에 나서게 됐던 것이다.

1996년보다 한해 앞선 1995년의 반도체 호황은 역설적으로 한국 경제가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리는 원인이 됐다고도 한다. 소득 1만 달러로 상징되는 1995년의 호황으로 인해 구조조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욱 파묻혀 버렸다.

그러나 반도체 호황은 다음해인 1996년 반도체 부진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238억 달러의 사상최대 연간 경상수지 적자를 만들어냈다.

하필이면 이 때 미국의 IT 호황이 겹쳤다. 경제원론으로는 중요한 수출시장인 미국의 호황이 한국에 나쁠 것이 없다. 하지만 이 때는 사정이 달랐다.

미국 사람들의 주머니가 넉넉해진 차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인터넷 보급에 따라 산업혁명에 준할 정도로 생산성이 높아진데 따른 호황이었다. 투자만 하면 수익이 나는 미국 경제는 전 세계의 투자자금을 필요로 했다.

투자자금을 유입하는 동시에 호황기에 부실이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는 앞서 1994년 2월부터 1년 동안 미국의 기준금리인 연방기금금리를 3.00%에서 7차례에 걸려 6.00%로 올려놓았다.

한국이 소득 1만 달러 샴페인에 흥청거리고 있는 사이, 국제 환경은 이제 미국에 투자하면 두 배의 수익을 낼 수 있는 시대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반도체 부진으로 들어오는 달러도 없는데다, 투자자금들은 미국을 놔두고 굳이 한국에 들어올 이유도 희박해졌다.

이런 환경에 제대로 대처를 못한 것은 ‘무능함’이나 ‘무식함’ 때문으로만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커다란 국난은 대개 성의는 있으되 지능이 부족해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의혹이 결부되게 마련이다.

한국은 1995~1996년 기간에 24개의 투자금융사가 종합금융사로 전환됐다. 지금은 멸종해버린 종금사 사람들이 은행원보다 더 귀족같은 기세를 떨치고 다니던 ‘종금사 전성시대’가 바로 이때였던 것이다.

국제 금융환경에서 은행과 대등한 인프라를 갖추지도 못한 회사들이 갑자기 국제금융계 신사 행세를 하게 됐다. 이 당시 유행하던 표현으로 유치원생이 양복입고 카지노 들어간 꼴을 드러냈다.

종금사로 전환되면서 외환 영업기능은 갖췄지만 자체의 신인도로는 국제 시장에서 돈을 빌려오기 어려웠다. 종금사들은 은행의 퇴직직원을 영입하던가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은행의 고위층과 유대관계를 늘렸다. 이 은행을 통해 어렵사리 외화자금을 구해왔던 것이다.

이같은 종금업계의 행태는 외국의 금융기관들도 알아차리게 됐다. 그래서 돈을 빌리려는 한국은행들에게 “이 돈이 실제로는 종금사로 들어가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네 은행 신용등급에 따른 이자로는 빌려줄 수 없다. 종금사 신용등급에 해당하는 이자만큼 더 내야 빌려주겠다”며 문턱을 높였다.

힘들게 힘들게 빌려온 돈은 대개 1주일 짜리 단기자금이었다. 막상 빌려는 왔는데 이 돈을 운용하는 곳이 또 마땅치 않았다. 한꺼번에 20여개 종금사가 늘어나다보니 자금조달 뿐만 아니라 운용까지 과당경쟁을 빚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찾은 투자처는 러시아, 인도네시아와 같은 곳의 채권들이었다. 상당수는 투자등급 여부조차 불확실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 채권에 대한 투자는 3개월 이상의 장기였다는 것이다.

1995년 환율이 700원대에서 자꾸 아래로 내려가던 시절만 지속됐다면 이렇게 사는데 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상은 반대로 뒤집히고 있었다.

발에 툭툭 걸리기만 하던 달러는 어느새 품귀 재화가 되고 있었다. 1995년말 모 기업 연구소에서 “1달러당 300원 시대를 대비해야 된다”고 호언장담했는데 해가 바뀐 새해 현실은 뭔가 달랐다.

연초 일시적 현상이려니 했는데, 6월 들어서는 환율이 800원도 넘어섰다. 8~9월에는 외환당국이 마치 모든 국가의 금고를 동원하는 기세로 820원 저지에 나섰는데 이것도 뚫리고 말았다.

10월에는 외국인들이 오래도록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외국인 주식투자자금 한도를 올려줬다. 그런데 한도 확대 당일 들어온 돈은 5000억원에 불과했다. 6억 달러를 조금 넘는 돈이었다.

당시 외환당국은 거의 매일 달러를 팔면서 환율 상승을 억제하는 시장개입을 하고 있었다. 6억 달러라면 아껴 써도 일주일, 대규모 개입을 한다면 겨우 이틀치에 불과했다.

몇 년동안 ‘한도 확대는 곧 주식 대박’이란 타성에만 젖어있었지, 미국에서 이제 이자를 두 배나 더 주고 있다는 점에는 누구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선진국의 상징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고, 국민소득도 1만달러 시대에 들어섰다. 이제 국제금융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귀족 중의 귀족 행세를 하고 다니는 세상의 기준을 충족했다.

그런데 웬지 현실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을 선진국 초기의 성장통으로만 여겼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안 하고 있는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전혀 핵심을 못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내온 수많은 세월 가운데 하나이면서, 이제 선진국이 되다 보니 뭔가 활기는 좀 덜한가 보다라는 생각들만 가득한 채 1996년 한 해가 저물어갔다.

내가 1년 전 연말 결산 때 처음 구경했던 12월 말일의 신나는 분위기는 이 때도 다시 벌어졌다. 은행원들이 결산 확인 뿐만 아니라 야근을 해야 하는 결제부서 직원들에 대한 배려로 함께 대기하면서 카드를 치는 가운데 산업은행에서 몇 걸음 떨어진 종각에서는 보신각종이 재야의 종소리를 울렸다. 정확한 설명은 어렵지만 잔뜩 들떠 있던 작년에 비해서는 좀 가라앉은 것 같은 그런 연말이었다.

이 시점에서 미국의 금리인상, 종금사 이런 것들을 크게 눈여겨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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