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새해 보신각종 타종 모습.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39] 한국 경제가 부도나 경제주권을 외국투자자들에게 위탁한 것이 1997년 외환위기다.

흔히 ‘IMF’위기라고 불리는 국난의 1997년 새해를 나는 좀 이상하게 맞이했다. 보신각종을 33번 울리는 종각 근처에 있기는 했지만, 그걸 보러 간 것이 아니고 직장인 산업은행이 종각 근처였기 때문이다.

은행의 연말 결산 관행대로 전날 모든 은행 직원이 밤늦게까지 결산 대기했다. 나는 솔직하게 한 구석에서 다시 유학가기 위한 자기소개서 10장을 쓰고 있었다.

은행 직무에 적응을 못해 결제반으로 좌천될 무렵, 은행은 나의 길이 아닌듯해서 석사에서 멈춘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판단을 1996년 5월에 내렸다. 2년 전 처음 유학 갈 때보다 GRE를 100점 이상 높인다는 목표로 퇴근 후 매일 공부를 시작했더니 의외로 은행 근무하는 자세까지 바로 잡히게 됐다.

자세가 바로 잡히니, 은행 생활도 어영부영 시키는 대로만 할 게 아니라 내가 제일 잘할 만한 것을 자원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조사반으로 오게 됐다.

조사반에서 ‘원달이 일기’라고 별명을 붙인 원달러 일기가 은행 내부 뿐만 아니라 기업고객들의 호평을 받게 되자, 순식간에 ‘글 잘 쓰는 사람’이란 명성(?)을 얻었다. 부부장께서 일간지에 기고하는 주간 환율 칼럼의 초안도 도와드리게 된 것은 내가 드디어 은행 생활의 확실한 방향을 잡았음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유학 공부는 계속했다. 꼭 가야겠다는 결의 보다는 이렇게 하니까 모든 생활이 제대로 틀이 잡혔기 때문이다. 저녁에 오늘은 어디 노는 자리 없나 일없이 기웃거리던 산만한 생활자세도 싹 사라졌다. 쓸데없이 산만해지는 일 없이 집중할 곳에 집중하니, 은행 일에 대한 몰입도 높아졌다.

휴가를 여름이 아니라 12월초로 잡은 것은, TOEFL과 GRE 시험을 이 때 몰아 잡았기 때문이다. TOEFL은 지금과 상당히 다른 페이퍼 테스트였고, 매번 문법 부분에서 68점을 확보하는 우리로서는 600점을 넘기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시아 유학생들이 아무리 620 이상의 높은 점수를 받아와도 언어 문제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란 판단에 오늘날 TOEFL 시험의 형태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GRE는 4년 전 시험을 치를 때 기억에 따르면, 어려운 단어를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7개나 되는 섹션을 한 자리에서 계속 시험 보는 자체가 체력한계 테스트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때 내 기억속의 GRE는 7개 섹션이었다. 실제 테스트는 6개 섹션이고 나머지 하나는 GRE를 주관하는 ETS의 분석을 위한 가짜 섹션이었다.

1992년 겨울 이 시험을 처음 치를 때, 상당히 고전한 Verbal 분야 하나를 마치고 이게 가짜 섹션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마지막 7번째 시험지를 받고서 깨지고 말았다. 시험지 인쇄 형태부터 앞선 6개와 달리 흐릿하고 문제 또한 어디서 본 듯 했다. 필시 이 7번째 섹션이 GRE 자료를 위한 가짜 테스트였을 것이다.

이때를 기억하고, 4년이 지난 이번에는 아무거나 가짜 테스트라고 속단하지 말아야겠다고 작정했다. 잠깐 쉬는 시간 줄 때를 기억해서 그 때 마실 커피우유도 하나 들고 갔다.

6개 섹션을 다 보는 동안 인쇄형태가 흐릿했던 섹션은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가짜 섹션은 마지막인가보다 생각했는데 시험장 분위기가 이상했다.

다들 가방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갈 기세였다. 4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을 인식해서인지, 다른 수험생들이 한참 어린 사람들로 보였다.

옆자리 학생에게 물어보니 가짜 섹션은 이제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모르고 7개 섹션 시험 볼 생각을 하고 왔던 것이다.

요즘은 유학도 유학원에 맡기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나한테는 생소한 얘기였다. 인터넷은 거의 안 쓸 때여서 학교 주소를 구해 입학사무처로 편지를 보내고, 입학원서가 오면 작성해서 응시료를 미국에서 통용되는 수표로 써서 발송했다.

제일 큰 일거리가 자기소개서였다. 예전에 쓴 것이 있지만 그동안 내 인생도 달라졌다. 은행 생활을 한 것을 대단한 경쟁력을 갖춘 것처럼 써야겠다고 작정하니까 쓰기가 더 어려워졌다.

쓰다가 딴전 부리다 하다 보니, 결산일 관행대로 곳곳에서 카드 치던 사람들은 점점 줄어갔다.

그러다가 휴게실에 잠시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깨서 보니, 아침 해가 벌써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한 테이블 서너 명이 그때까지 남아서 승부를 겨루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사람들과 나는 서로 ‘대단한 사람이야’라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나는 밤새 허리 아픈 줄도 모르고 승부를 겨룬 그 사람들이, 그들은 연휴 때 집에 안가고 일없이 사무실에서 자는 내가 대단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연말 결산의 풍속도로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신년 연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월1일 뿐만 아니라 2일도 공휴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설날이 완전히 음력으로 옮겨가 신년 휴일은 1월1일 뿐이다. 연휴가 아닌 공휴일이 되니 연말 정산을 예전처럼 들뜨게 보낼 마음들이 안 드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잠을 자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지가 참으로 찌뿌듯하다. 만약 이러고 다음날 출근한다면 대단한 고역이겠지만, 공휴일이라면 마음이 처량해진다.

남들은 이제 활기차게 야외도 나가보려는 시간에 나는 오로지 누울 생각만 하면서 집을 찾아가고 있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는 작년보다 덜했는데, 새해 아침도 떨떠름하게 맞이했다.

그런데 이것은 나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이틀을 쉬고 1월3일 처음 열린 1997년 외환시장도 마찬가지였다.

프로야구에서 몸에 심각한 부상이 있는 줄 모르는 에이스 투수의 시즌 첫 등판을 생각하면 되겠다.

1월3일 외환시장을 보면서 떠오른 것은 LG 트윈스 에이스 이상훈의 1996년 개막전이었다. 전년 20승 투수 이상훈은 이날 많은 실점을 했다.

어깨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더 많은 경기에서 부진한 뒤였다. 이 부상으로 인해 이상훈은 선발이 아닌 마무리 투수로 전환하게 된다.

지난 한해,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외환시장을 떠받치고 있던 ‘대형(大兄)’의 1997년 1월3일 모습이 부상을 모른 채 부진한 선발 투구를 하던 1996년의 이상훈같았다. 대형은 나의 원달러일기에서 외환당국을 의미했다.

 

[40회] 'IMF 1997년', 새해 첫 거래부터 외환당국이 흔들렸다

[38회] 한국사에서 상대적으로 주목 못받는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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