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40] 프로야구 LG트윈스의 이상훈은 1995년 시즌 20승을 올린 에이스였다. 시즌 20승은 1990년 선동열 이후 5년 만에 나온 귀한 기록이었다.

LG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야구 전체의 에이스였다. 다음해 현대 유니콘스와의 개막전에 선발로 나선 것은 당연했다.

LG는 전년 국가대표 거포로 기대에 못 미쳤던 심재학이 경기 초반부터 홈런 두 개를 날리는 맹타로 초반 4점을 올렸다. 그런데 뜻밖에 이 점수를 이상훈이 지키지 못했다.

9회 다시 득점에 성공해 승리하면서 승리투수는 이상훈이 아닌 구원전문 김용수에게 돌아갔다.

20승 에이스가 부진한 모습을 보여 LG팬들은 이겨도 찜찜한 승리였다. 시즌 중 거의 매일 경기를 치르는 프로야구에서 한 두 경기 부진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훈의 부진은 한 두 경기로 끝나지 않았다. 시즌이 한참 지나서야 그의 어깨에 이상이 생겨 이제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상훈이 마무리 투수로 전환한 게 이 때다. 팀의 기본 구조를 바꾸는 리빌딩이 불가피해졌고 재작년 우승, 전년 준우승팀 LG는 1996년 8개 팀 중 7위로 시즌을 마쳤다.

한국의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를 얘기하는데 프로야구 선수를 언급했다. 1997년 외환시장의 첫 거래일이 9개월 전 이상훈의 시즌 첫 등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 프로야구 LG트윈스 이상훈의 투구 모습. /사진=LG트윈스 1997년 홈페이지.


신년 연휴 이틀을 쉬고 1월3일 외환시장이 열렸다.

지난해 1996년은 특히 하반기부터 외환당국이 모든 것을 석권한 한 해였다. 800원커녕 820원과 840원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래도 딜러들은 외환당국의 시장개입을 한순간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출대금 유입이 줄어든 반면, 각종 달러 지급이 늘어나는 사정으로 인해 달러를 사야하는 실수요도 있었지만, 딜러들은 전망에 따라 수익을 남기는 사람이다. 달러를 가능한 많이 사들여야 마땅했지만, 당국의 개입으로 인해 손실을 남길 것이 걱정이었다.

최소한 1996년 만큼은 당국의 위력이 제대로 먹히고 있었다. 한마디로 야구판의 20승 아니라 30승 에이스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1997년 1월3일의 외환시장 ‘개막전’에서 당국은 개장 초부터 단단히 작심을 하고 덤벼들었다.

그날 나의 원달러 일기는 다음과 같은 스코어 표로 이날 시장을 요약했다.

USD 000 010 012 4
KRW 500 010 00x 6

한국 원화(KRW)가 2점차 이겼다는 것은 이날 환율이 약 2원인 1.5원 하락했음을 비유한 것이다. 1996년 12월31일의 844.9원에서 1997년 1월3일 843.4원으로 낮아졌다.

그러나 개장 직후 840.4원으로 4.5원이나 떨어졌던 것에 비해서는 낙폭이 급격히 축소되며 마감됐다.

초반 환율을 5원이나 떨어뜨린 주체는 역시 당국의 개입이었다. 새해를 맞이해 마치 작심이라도 한 듯 당국은 엄청난 달러를 풀어대면서 시장을 강타했다. 새해에는 달러 강세를 용인하지 않겠냐 기대했던 딜러들로서는 뜻밖의 강공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은 이런 ‘공권(公券)력’에 대한 경외심이 바로 당일 오후가 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5회말의 1점을 표시한 것은 이런 반동을 억제하기 위해 오전보다는 약한 개입이 또 한 번 있었다는 뜻이다.

야구로 비유하면, 이날의 외환시장은 투수가 아무리 20승 아니라 30승급 투수였어도 다 지나간 작년 얘기였다는 것이다. 중반이 지나면서 ‘상대 타자들’은 절대로 못 칠 공이 아니라고 깨닫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두들겨댔다. 오후의 ‘확인 개입’까지 있었는데도 달러 매수 세력은 갈수록 강해졌다. 마감 전 3원을 끌어올렸다.

당국의 시장개입을 오히려 달러 받아먹고 맞받아치는 기회로 간주하는 1997년 외환 참사를 이날 첫 거래에서 살짝 내비치고 있었다. 이날도 만약 거래 시간이 좀 더 길었다면 1.5원 하락조차 상승으로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공권의 끗발’이 전혀 먹히지 않는 외환시장의 모습은 당국으로서 상당히 당혹스런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틀 연휴 뒤 개장한 이날이 금요일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이틀의 쉬는 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주 월요일인 1월6일 다시 1.3원 상승했다.

외환시장을 지켜보는 관계자들은 한국의 외환당국 ‘몸 상태’가 1996년과 같지 않다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한 새해 첫 거래였다. 이 사람들 중에는 당연히 해외 투기성 자본으로 진작부터 한국을 유심히 지켜본 자들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연중 한때 환율이 1995원까지 치솟으면서 사실상의 국가부도 상태를 만들어낸 1997년 외환시장은 첫날을 이렇게 보냈다.

 

[41회] 20년 만에 돌아보는 1997년의 시작

[39회] 'IMF 위기'의 1997년, 새해 첫 햇살부터 쇳덩어리 같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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