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유승민 의원이 지난 4일 한국은행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이주열 총재에게 1997년 외환위기 때와 비슷한 상황이 아니냐고 질문하고 있다. /사진=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41] 우선 2016년의 얘기를 꺼내보기로 한다. 최근 한국 조야에서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와 비슷한 상황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유승민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4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5일 유일호 경제부총리에게 본격 문제제기한 것을 시작으로 그동안 경제부처를 두둔하는 성향을 보이던 이종구 새누리당 의원까지 20년 전 위기 반복 가능성을 경고했다.

유승민 의원의 질문에 대해 이주열 총재는 대외지급능력이 그 때와 다르니 상황도 다르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유일호 부총리 또한 이종구 의원의 지적에 대해 국제신용평가기관의 한국에 대한 신용등급 상승을 제시하며 위기론을 불식시키려고 했다.

수많은 경제위기 가운데 오로지 외환위기만의 발생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라면, 유 부총리와 이 총재가 틀린 답변을 내놓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려되고 있는 문제는 외환이 아닌 원화 경제의 위험이다. 20년 전에는 외환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원화가 문제다.

1997년 위기는 돌이켜보면, 외환 일개 부문만 잘못해서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차원의 문제인 한국사회의 모순과 국가 엘리트의 무능력이 특히 1995년 이후 집중됐다.

국가 엘리트의 실정은 종금사 난립, 현실에 무지한 환율정책을 통해 외환부문을 두드러지게 취약한 부문으로 만들었다. 국난의 위기가 외환영역을 고른 것은 이곳이 가장 취약한 방어체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외환분야만큼은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면 위기는 다른 영역을 통해 표출됐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가계부채 문제, 해운 위기에서 보여주는 국가엘리트들의 모습은 1996년보다 다른 점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다.

갤럭시 노트7 단종사태는 1996년 반도체 수출 부진을 연상시킨다. 국가 경제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기업의 부진이 국가적 고난으로 이어질 것인지 우려되는 것이다.

미국이 1994~1995년과 같이 현재 국제 투자자금을 미국으로 역류시키는 금리 인상에 나선다는 점도 유사하다고 지적되고 있다.
 

▲ 비교적 정부에 대해 논리적 뒷받침을 해주던 이종구 의원은 14일 국정감사에서는 유일호 경제부총리에게 위기의식을 강하게 가져야 한다며 "금모으기 운동과 같은" 과감한 결단을 촉구했다. /사진=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이 시리즈에서 줄곧 강조하는 것은, 1997년 한국이 갑자기 위기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당히 오랜 세월, 잘못된 것들에 대한 증상이 1996년 1년에 걸쳐서 매우 강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위기 발생 8개월 전인 1997년 3월, 한국사회에 난무한 단어는 ‘몸통’ ‘깃털’ 따위였다. 한보 부도 때 정치권의 부패를 지적하는 용어다.

구조조정과 같은 정말로 절실한 용어는 아무도 안보는 몇몇 연구원들의 노트에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었다. 당시 힘을 쓸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조조정’은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지적 유희로만 여겨졌다.

‘IMF 위기’를 언급할 때, 시간에 따른 혼란도 일부 존재한다. 1997년 위기가 아니라 1998년 위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받기로 한 것은 1997년 11월이다. 그에 따른 조건으로 한국은 살인적인 고금리를 수용했다. 이 혹독한 합의의 여파가 제대로 나타나기 전에 해가 1998년으로 바뀌었다.

무수한 기업이 쓰러지고 국민들이 신용불량자가 돼 도피하는 일은 1998년이기 때문에 1998년 위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IMF 위기를 ‘조기 극복’한 사실에 대한 자부심으로, 1998년은 위기 극복이 시작된 해이고 ‘IMF 위기’는 1997년이 맞다고 여긴다. 이 시리즈를 쓰는 기자는 1996~1997년 위기라고 여기고 있다. 1997년의 한보 기아 부도 뿐만 아니라 1996년의 사상 최대 무역적자도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환율 급등은 1996년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1998년은 극복 노력이 시작되기도 했지만, 그에 따른 고통을 드디어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직장을 잃었고 거리로 나와 서울시내에 노숙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보증을 서준 사람이 빚을 갚지 않고 도망간 때문에 덩달아 도망가는 사람이 속출했다.

위기의 극복은 그것을 인식하고 고통을 느끼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최근 정치권의 한 인사는 한국이 2016년 현재의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우선 수백만명의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는 것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 의견도 제시했다.

그나마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런 경고성 발언이 19년, 20년 전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목소리들을 실제 국정관리에 반영할 수 있는 건전한 정치 카리스마가 과연 존재할까. 이것은 어쩌면 그때보다도 못한 것은 아닌가.

다시 말해, 국난을 당해 전 국민이 돌반지, 결혼반지를 장롱에서 꺼내도록 국가에너지를 결집할 수 있는 인물이 과연 있느냐다. 생각 다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인은 꿈도 꿀 수 없는 얘기다.

무역적자, 환율급등에 내내 시달리다 연말부터는 노동법 파동으로 시끌벅적하던 1996년이 끝나고 1997년이 드디어 시작됐다. 외환시장의 의미심장하게 불안불안한 첫날 모습은 전 회에서 소개했다.

‘IMF 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발생해 전 국민을 혼란에 빠뜨린 것이 아니다. 국난은 최소한 2년 전에 시작돼 이 땅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증상을 표출한 것도 아니다. 조금씩 이런저런 신호를 보냈다. 아무도 그것을 눈여겨보고 귀담아 듣지 않았을 뿐이다.

위기 에너지는 점차 증폭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여태 살아온 것처럼 이런저런 일상 속에 맞이한 그런 또 하나의 새해였다.

내가 있던 외화자금실은 외화자금부로 부서 확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산업은행이 꽤 오래전부터 추진한 일이지만, 정부의 허락을 받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지금까지는 국제영업부장 밑에 같은 부장급인 외화자금실장이 이끌던 부서가 정식 부장인 외화자금부장이 통솔하는 부서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기안을 주로 내가 있던 조사반에서 작성했다. 그런데 해외 석사 출신이라고 은행 들어온 지 1년을 조금 넘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었다.

나보다 늦게 조사반에 합류한 대리가 수도 없이 많은 보고서를 써내며 이 일을 맡았다. 어느 토요일은 이 일 때문에 저녁 무렵까지 남아있기도 했는데 나는 그냥 남아있기만 했을 뿐 도울 일이 별로 없었다.

연초 드디어 부서 확대 작업이 마무리 됐다. 조사반 하는 일은 큰 변동이 없었지만 나한테 대단히 아쉬운 것은 조사반 위치가 백오피스에서 프런트로 옮겨가게 됐다는 점이다.

파생상품반에서 5개월 있는 동안, 프런트가 겉모습만 화려하지 사실은 공기도 탁하고 이래저래 불편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백오피스는 구식 사무집기에 별로 산뜻하지도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나에게는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곳이었다. 그런데 외자부로 승격되자, 부서 자체의 서무반 공간도 필요해졌다. 그래서 조사반이 안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15층 외자실에서 멀리 떨어진 3층에서 국제영업부장으로 외자실을 원거리 통솔하던 정형배 부장이 외자부장이 됐다. 명목상 내 소속부장은 여전히 같은 분인 것이고, 그동안 실질적 부서장 같았던 외화자금실장은 다른 부장으로 옮기게 됐다.

그해 있었던 몇 가지 은행 내 파동에서 정형배 부장의 ‘그 시대 분들’과 다른 예사롭지 않은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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