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42] ‘IMF 외환위기’의 1997년 새해 벽두 최대 관심사는 경제가 아니었다. 1996년 말 크리스마스 새벽 국회에서 여당인 신한국당 의원들이 기습적으로 국회 본회의장에 모여 노동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제1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앞선 총선 참패로 의석이 70석 규모로 대폭 축소됐다. 50석으로 대약진한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과 연대를 통해 여당에 맞서고 있었다.

노동법 개정안은 김영삼 대통령의 행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였다. 당내에서 일부 반대 소리가 나오는 것은 주류 강경파가 윽박을 질러가며 잠재웠다.

당시 집권세력 가운데 일부는 1997년 외환위기에 대한 변명으로 이 때 노동법에 대한 시민과 야당의 반대를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기술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정리해고나 복수노조와 같은 문제들이 종금사 난립 등으로 인해 고갈된 외화유동성을 어떻게 당장 해결할 수 있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이다.

외환위기의 결정타가 된 한보와 기아의 부도 가운데서도, 특히 한보의 부도는 노동운동과 거의 무관하다. 한보의 은행 돈을 쏟아 부으며 빚으로 빚을 막는 경영행태는 국민들의 상식을 크게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몸통’ ‘깃털’과 같은 정치권 유착시비까지 빚어졌다.

기아의 부도 또한 다른 재벌의 자동차 진출 시비까지 빚어진 마당에 노사갈등이 최대원인이라고 지적하기도 어렵다.

설령 이들 기업이 부도를 막았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IMF 위기’를 막았을까.

그해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국난 일보직전의 위기를 맞게 된 최대 원인은 선진국에서 1주일짜리 자금을 빌려서 회수가 의문시되는 나라에 3개월로 빌려준 행태에 있다. 무더기로 늘어난 종금사들의 갈 곳 없는 경쟁이 이런 ‘기간불일치(미스매치)’ 문제를 일으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도체 수출이 제대로 안 돼, 사상최대 경상적자가 나면서 환율이 치솟았다. 여기다 미국은 3%이던 금리를 6%로 올려 해외에 나가있던 자금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한국의 은행들에 있던 외국인 자금 역시 한국을 빠져나갔다.

한보 기아의 고비를 넘더라도 뭐 하나만 터지면 온 나라가 결딴날 위험상태인 점은 변함이 없었다.

노동법 처리에 반발하는 시민들은 명동성당에 모여 농성을 지속하는 가운데 새해가 시작됐다. 연말 대통령선거의 유력한 여당후보인 이회창 전 국무총리는 정부와 민심 사이에서 어정쩡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 가족 병역시비 탓으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한국 정치의 속성에서 보면 본질에서 벗어난 얘기다.

‘천명’이 중시되는 한국 선거는 ‘될 사람’과 ‘안 될 사람’을 구분 짓는 명분을 찾는 습성이 있다. 병역시비는 이 전 총리를 ‘안 될 사람’으로 구분하려는 핑계거리였다.

중요한 것은 그가 가장 유력한 ‘될 사람’이었다가 ‘안 될 사람’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시작이 노동법 파동에서의 대처였다. 이 또한 어찌 보면 이회창 한 사람의 잘하고 못하고 보다, 50년 동안 선거 통한 정권교체가 한 번도 없었다는 인식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정치뉴스가 신문에 가득한 어느 날, 산업은행 직원인 나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사진이 일간지에 실렸다. 김시형 산업은행 총재가 나온 사진이었다.

김 총재의 인상은 정말 귀한 댁의 공자 같은 부드러운 위엄이 가득했다. 신입행원들이 총재 앞에서 마음껏 의견을 내는 자리가 있었다. 신입연수를 가기 직전의 이들은 정말 마음껏, 어디서 ‘줏어들어 본 것’같은 얘기들까지 거침없이 다 꺼냈다. 개중에는 기관의 최고위층이 답변하는 자체가 난처할 수도 있는 것들도 있었다. 이런 의견에 잔잔한 미소로 시종하면서 답변하던 김 총재의 모습은 당시에 없던 요즘 표현으로 ‘우월함’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신문에 나온 총재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온갖 수심이 가득해 우울함이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도 옮겨지는 듯 했다. 이토록 인상이 귀한 분 얼굴도 이렇게 될 수 있나 싶은 사진이었다. 옆 자리에는 다른 은행장 두어 명이 더 있었다. 장소는 서울 종로 제일은행 본점이었다. 얼마전 루디거 돈부쉬 MIT 교수도 참석한 금융연구원 토론회를 보고 온 그 건물이었다.

산업은행과 제일은행, 조흥은행 등이 한보철강에 대한 부도처리를 발표한 것이다. 

그해 한국의 1.4분기가 모두 빨려 들어가는 한보사태는 이렇게 시작했다.
 

▲ 제일은행은 1997년 한보 부도로 결정적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외환위기를 맞았다. 마침내 외국계 구조조정 펀드인 뉴브릿지 캐피털에 넘어갔다가 정통 금융자본인 스탠더드차터스가 이를 인수해 이름을 SC제일은행으로 바꿨다. SC제일은행 본점의 모습. /사진=뉴시스.


사실 한보사태의 시작은 훨씬 오래전부터일 것이다. 수면 아래서 무수한 움직임들이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뿐이다.

한보 총수 일가는 정치권 등 실력자들과의 인연을 앞세워 은행 돈을 자기돈 쓰듯 끌어 썼다. 사업이 부진하든, 빚의 상환이 다가오든, 돈이 필요해지면 다시 대출을 받으면 된다는 식의 자금 관리였다.

한보가 은행을 소유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기업과 은행간 차단벽이 제대로 작동 못할 때 심각한 교훈을 한국 경제에 남겼다.

은행의 본분은 사업성 좋은 기업을 찾아내 자금을 지원해서 부가가치를 키우는 것이다. 사업성 좋은 기업을 찾아내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 기업 사업의 허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은행의 문턱이 높고 은행원들의 자세가 깐깐한 것은 본질적으로는 당연한 덕목이다. 빈틈이 있는 사업을 가려내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살릴만한 기업만 살리는 길이다.

은행이 기업에 대해 이런 검증을 전혀 하지 못하고, 누구의 전화 한 통으로 당연한 듯이 고객 예금으로 받은 돈을 꺼내줄 뿐만 아니라 은행 특유의 신용창출 과정으로 존재해 보지도 못한 돈까지 대출을 제공하면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한국이 한보 사태를 통해 얻은 교훈이다. 그런데 세월 지나면서 그걸 망각한 듯한 주장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 역사에서 금산분리, 그중에서도 은산분리는 그렇게 함부로 구시대 고리타분한 소리로 취급할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뼈를 잡아 삼킨 교훈이 여기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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