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43] 이 시리즈를 쓰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기록의 부재다. 2004년쯤 산업은행 자금거래실을 방문해 내가 썼던 원달러일기를 찾으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앞서 밝힌 것처럼, 나의 원달러일기는 공식적인 결재절차를 밟아서 쓴 것이 아니라 내가 독자적으로 판단해 조금이라도 고객기업들에 도움이 되려고 자발적으로 쓴 것이다. 자료를 어떻게 보관해야 된다는 규정 같은 건 없었고, 나도 그런 걸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때는 업무용 서버를 활용하지도 않을 때였다. 매일매일 쓰는 보고서는 몇 백 장씩 묶어서 사무실 창고에 보관했다. 산업은행은 2001년 무렵 종로의 삼일빌딩에서 지금의 여의도 본점으로 이사했다. 1996~1997년 원달러일기를 좁은 공간에 용케 보관했더라도 이사하는 과정에서 없어졌을 가능성도 크다.

820원이 무너지던 1996년 8~9월 외환시장의 공방은 너무나 격렬했기 때문에 당시 일기를 쓰면서 가졌던 정서를 지금에 와서도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다. 그러나 1997년 새해가 되면서 벌어지는 환율 변동은 어느 특정한 하루를 콕 찍어서 얘기하기가 매우 어렵다. 820이 무너지고 840이 무너지고, 그 과정에 마치 후퇴의 명분을 찾으려는 듯한 시장 개입은 매번 이뤄지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시장은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정서를 갖게 됐다.

1997년 초 주요 환율 변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년말 844.9원 (이하 종가)
1월21일 852.8원 (당일 3.2원 상승)
1월30일 864.2원 (당일 4.8원 상승)
2월13일 874.4원 (당일 5.1원 상승)
2월17일 880.0원 (당일 5.6원 상승)
2월18일 870.5원 (당일 9.5원 하락)
2월19일 859.0원 (당일 11.5원 하락)
2월24일 864.9원 (당일 7.8원 상승)

어느덧 860원이 무너지고 880원이 무너져도 힘주어 기억할 것도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2월18일과 2월19일의 대폭 하락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아 당시의 경제신문을 찾아봤다. 원인은 역시 당국의 대규모 개입이었다.

하루에 9.5원, 11.5원이 떨어졌다면 못해도 당일 3억 달러 이상씩의 달러가 시장에 팔린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한보가 1월23일 부도처리되면서 정부는 각종 불안심리가 퍼지는 것에 대해 더욱 예민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여전히 근본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 올라서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선진국의 위세를 떨쳐야 한다는 강박증을 못 버리고 있었다.

한국 경제 수준에 800원대 환율은 과분하다는 새로운 균형 인식을 갖지 못했다. 정부의 인식은 ‘일시적 달러 강세에 편승한 투기세력들 때문’에 환율이 오른다는 것이었다.

2월18~19일의 대규모 하락은 달러를 움켜쥐고 있는 기업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의도로 풀이됐다.

공교롭게도, 이틀간 대규모 개입 맹폭격이 이뤄지기 직전인 2월18일자 유력 경제일간지가 환율 상승에 대해 1면 톱으로 심각성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대규모 시장 개입은 이 보도가 나간 당일 날 이뤄졌다.
 

▲ 원화환율의 지속적 상승을 1면톱으로 다룬 매일경제의 1997년 2월18일자 모습. 공교롭게도 이 보도가 나간 직후 이틀 동안 대규모 외환시장 개입이 단행됐다. 엄청난 달러 매각을 통해 이틀동안 원화환율이 21원이나 하락했다. /사진=매일경제,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화면캡쳐.


하지만, 시장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국가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만약 있다면 그 나라에 시장이 없을 때뿐이다.

국민들의 모든 눈이 신한국당 단독으로 처리된 노동법으로 인한 명동성당의 대치 현장과 한보그룹 사태에 몰려 있는 동안, 외환시장은 이런 일을 겪고 있었다.

당시에는 외환시장에도 상한가와 하한가가 있었다. 전날 외환거래에 따른 가중 평균을 구해 이를 매매기준율로 고시하고 당일 날 외환거래를 매매거래율의 상하 2.25% 범위에서만 이뤄지도록 했다. 20원 이상은 상승이나 하락을 할 수 없었다.

얼핏 보면 환율 급등락을 막는 안전장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안전장치였다면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사라졌을 까닭이 없다.

기업과 딜러들은 상한선 때문에 오늘 다 못 오를 환율은 내일 다시 오를 것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힘들게 물건 만들고 팔아서 벌어온 달러를 급한 사정 아니면 오늘 내다팔 이유가 없었다. 이런 기업들의 행위는 절대로 환투기라고 몰아붙일 수도 없다.

상한가 때문에 환율이 더 이상 오르지 못하면 그날 외환시장은 거래가 사라졌다. 경제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시장이 되고 있었다.

환율 등락의 상하제한은 정말 위급한 상황에서는 전혀 안전장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때, 한국의 외환시장은 너무나 치명적인 실수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전 세계의 하이에나들이 잔뜩 몰려 있는 한 가운데를 일부러 피를 흘려가며 지나간 것과 같은 실수였다. 다음 회에서 소개할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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