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한보 부도 사실을 전하는 당시 일간지.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화면캡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46] 이른바 ‘IMF 위기’라고 하는 1997년 외환위기를 토론할 때 어려운 점은 단 하나의 최대원인을 찾기다.

여러 가지 원인 가운데 어떤 것이 핵심이냐는 거다. 예를 들어, 종금사 사태를 최대 원인이라고 지적한다면, 만약 1996년을 전후해 무더기 종금 전환을 하지 않았다면 외환위기가 안 났을 것이라고 확신하느냐는 반론이다.

1997년으로 접어드는 한국 경제는 여러 가지 난제들이 겹치고 있었다. 이것들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국난을 초래할만한 파괴력을 가졌다. 이런 점이 국가부도 사태에 책임을 지고 벌을 받아야 할 자들에게 도피처로 악용되기도 한다.

무더기 종금사 허가에 관계된 자들은 한보 기아 부도나 대기업 부채 부실로 핑계를 댄다. 한보 부도에 관련된 자들은 종금사나 반도체 수출 부진 때문이었다고 강변하다. 모든 것을 총괄한 당시 집권세력은 야당이 노동법 처리 때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우긴다. 이 시리즈를 통해 거듭 주장했지만, 노동법이 일방 처리된 1996년 12월25일, 한국의 금융 상태는 이미 파국이 90% 확정된 길로 가고 있었다.

한보 사태는 외환위기 과정에서 이미 온 몸에 병균이 침투한 사람이 드디어 발병한 것에 해당한다. 이제야 한국이 환자임을 스스로 인식하게 된 건데, 그것도 여전히 위독한 환자임을 깨닫지 못하고 심한 감기 정도로만 인식했다.

은행감독원 지휘 하에 은행들이 모여서 부실해진 대출 수습방안 정하고 나면 곧 정상으로 돌아갈 일 정도로 여겼다. 혹시 누군가는 “내가 장영자 사건도 수습한 사람이다”라고 큰 소리쳤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골수에 파고든 병은 굳이 흔적을 감추지 않았다. 그 표시 역시 나타난 것은 외환시장이다.

산업은행 외화자금부는 한보 부도 이후인 2월에도 은행의 외화자금 조달이 다소 어려워지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수급을 맞춰갈 수는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갑자기 산업은행 쪽으로 자금 수요가 늘어났다. 시중은행들이 산업은행 쪽으로 외화 조달을 요청해 온 것이다. 한보 사태 이후 시중은행들은 그동안 상대하던 외국 금융기관들의 문턱이 높아진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형편이 나은 산업은행을 통해 자금 조달에 나선 것이다.

산업은행도 조달 여건이 전만 못한데 요청이 늘어난 것은 감당하기 힘들게 됐다. 심야데스크를 한 명의 간부와 딜러 몇 명이 담당했는데, 외화의 수요에 비해 공급을 맞추기 힘든 날이 거듭됐다.

그래도 여전히 ‘좀 힘든 날들이 당분간 지속되는’ 정도로 다들 인식하고 있었다.

통화당국 기관인 한국은행에서는 조금 앞선 진단이 나오기는 했다.

최연종 당시 한국은행 부총재는 3월초 부총재실로 핵심 간부 몇 사람을 불렀다. 이상헌 조사부장과 정규영 국제부장 등 촉망받는 부서장들이 모였다. 두 사람은 나중에 한국은행 부총재보를 거쳐 각각 금융결제원장과 서울외국환중개 사장을 지내게 된다.

회의에서는 뾰족한 해답을 찾기 어려웠다.

최 부총재는 간부들을 향해 “야! 겁난다”라고 일갈했다. 부총재의 고함에 정신이 번쩍 들은 간부들은 부서로 돌아가 여러 가지 대응책을 마련하는데 부심했다.

며칠 후 이들은 다시 최 부총재의 방에 모였다. 저마다 보고서 하나씩 들고 왔다.

이상헌 부장은 정규영 부장이 들고 온 보고서에서 ‘외환위기’라는 단어를 보게 됐다. 당국 기관으로서는 ‘금기’에 해당하는 단어가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문서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됐다.

이상헌 부장은 수년 후 이 보고서에 대해 설명했다.

“정규영 부장이 특별히 의미를 줘 가면서 외환위기를 언급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다보면 이론적으로 발생 가능한 것 가운데 하나를 제시한 정도였습니다.” 

이어 그는 “어떤 형태로든 외환위기라는 것이 언급되는 것을 처음 본 건 바로 그때”였다고 덧붙였다.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면, 이론적으로는 외환위기가 올 수 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냐는 정서가 여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못 보던 단어도 나올 정도이니 금융당국은 사력을 다해 수습에 매달렸다.

골수에 박힌 병은 정체가 드러나기 전에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잔병으로 가면을 쓴다. 한보가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상헌 부장은 “한보는 그럭저럭해서 수습을 해 놨습니다. 그런데 곧 바로 기아가 부도나니까 그 때는 정말 속수무책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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