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드라마 '위대한 폭군 진시황'의 한 장면.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칼럼] 중국 전국시대의 엄청난 부자 여불위와 아버지의 대화다.

“농사를 지으면 몇 배의 이익을 볼 수 있습니까?”

“10배의 이익을 보게 된다.”

“구슬이나 옥 같은 보물 장사는 몇 배의 이익을 봅니까?”

“줄잡아 백배의 이익은 생긴다.”

“만일 한 사람을 도와 일국의 왕이 되게 하고, 그 나라 강산을 잡는다면 그 이익이 몇 배나 되겠습니까?”

이 말에 여불위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참으로 한 사람을 왕이 되게만 한다면 어찌 그 이익을 천 만 배라고만 하겠느냐?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라고 말했다.

여불위가 느닷없이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그날 낮, 거리에서 예사롭지 않은 구경을 해서다.

그가 살고 있는 조나라 한단의 거리에서 귀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을 가졌으나 전혀 패기를 느낄 수 없는 인물을 봤다. 한마디로 저평가된 인물이어서 장차 그 가치가 더 이상 떨어질 일은 없어보였다. 그 대신 한번 가치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끝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란 예감을 받았다.

그 사람은 현재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는 진(秦)나라의 왕손 이인이었다.

7개 나라가 각축을 벌이고 있는 진나라는 군사력이 다른 나라 여섯을 모두 합쳐도 제압할 만한 강국이었다. 그런 나라의 왕손이 남의 나라 볼모로 오게 된 것은, 비록 왕의 손자라 하나 생모를 일찍 잃고 아비의 사랑도 별로 못 받은 까닭에 외교수단으로 버림받은 까닭이다.

허울만 좋은 최대강국의 왕손이지, 실상 이인은 하루하루 아무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한단 거리를 구경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여불위의 눈에 뜨인 것이다.

상인의 본능으로 이인에게 엄청난 투자가치를 직감한 여불위는 그에게 접근해 호감을 얻었다. 막대한 재산을 아끼지 않고 투자해 진나라를 다니면서 곳곳에 로비했다. 태자 안국군에게도 접근해 아무리 아들이 많아도 이인만한 아들이 없음을 설파했다.

마침내 안국군은 오랜 세월 자식처럼 여기지도 않던 이인에게 새삼 아비의 정을 느꼈다. 그를 귀국시킬 뿐만 아니라 부왕인 소양왕에게 청해 이인을 태손으로 정했다.

여불위는 진나라에서의 로비와 조나라에서 이인을 보호하는 일에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헌신했다.

행운과 불행은 양날의 검을 갖고 있다. 불행이 한번 오면 하나만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가 한꺼번에 오지만 행운 또한 마찬가지다. 없던 행운이 한번 찾아오면 여러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온다. 그런데 난데없이 몰려드는 행운에는 불행의 싹이 숨어있다. 오로지 자제하는 마음으로써 이것을 물리칠 수 있는데, 배웠든 못 배웠든 사람의 어리석은 속성이 눈앞의 행운에만 집착을 한다.

이인이 여불위를 크게 신뢰해 그 집을 자주 드나들다 여불위의 애첩에게 반해 버렸다. 여불위에게 간청해 그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

여인은 그 때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밴지 두 달이었데 이를 숨기고 이인의 여인이 됐다는 얘기가 전한다. 장차 세상을 파국으로 몰아넣을 사람의 혹독함이 태중에서부터 발동한 것인지 아이는 열 달이 지나도 두 달을 더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세상에 나왔다. 그래서 왕실 어른들로부터 의심을 면했다. 그가 바로 훗날의 진왕 정, 즉 진시황제다.

이 얘기는 나중에 진나라를 대체하는 한나라가 진시황제의 정통성을 폄하하기 위해 지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진시황제가 생전에 다른 형제로부터 출생에 관한 도전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한나라가 전적으로 조작했다기보다 기존의 소문에 편승해 더욱 조장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인이 진나라로 돌아오자 이미 고령이었던 증조부 소양왕이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인의 아비인 세자 안국군이 즉위 1년 만에 죽었고, 이인 또한 뒤를 이어 왕이 됐다가 3년 만에 죽었다.

일찍이 여불위의 애첩으로 이인의 부인이 된 여인은 짧은 기간에 신분이 태자비, 왕후가 됐다가 이제 아들 정이 즉위하면서 태후가 됐다. 남편을 잃자 그는 첫 남편 여불위와 다시 사랑에 빠졌다.

이렇게 엄청난 권력의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을 여불위는 뿌리치지 않았다. 원래가 장사꾼 출신인 여불위로서는 거래의 이익만 알았지 정치가 내포한 위험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왕실을 옹립한 최대 공신에다 태후의 정인인 여불위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진나라 국정이 모두 여불위 것이었다.

그러나 태후의 그치지 않는 정욕에 여불위도 마침내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노애라는 건장한 남성을 환관이라 속여 태후의 옆에 붙여줬다.

태후는 노애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쾌락을 누리다 애를 둘까지 낳아 숨겨서 기르고 있었다. 이 사실이 마침내 진왕 정에게 알려졌다. 두려운 노애는 차라리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자신과 태후가 낳은 아이를 왕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색만 밝힐 줄 아는 노애가 살벌한 정변으로 왕을 쓰러뜨리는 건 택도 없는 얘기였다.

노애는 거열형이라는 끔찍한 형벌로 처형됐다. 두 아이는 동모 형제인 진왕 정에 의해 포대자루에 덮인 채 맞아 죽었다. 태후는 아들인 진왕에게 감히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빌지도 못했다.

사건을 파헤치면서 노애를 여불위가 태후에게 천거한 사실이 밝혀졌다. 진왕은 여불위를 즉시 수도인 함양에 연금했다가 하남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신들이 여불위를 접촉하는 정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모든 직위를 박탈해 촉으로 추방했다.

근세까지도 중국에서 촉으로의 추방은 ‘자결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여불위는 참수될 것이 두려워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

일찍이 여불위의 아비가 국권을 농락하는 이익을 헤아릴 수 없다고만 얘기한 것은 그 또한 상인일 뿐이니 정치의 위험을 알지 못한 때문이다.

애초부터 국권이란 것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권은 만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고금의 이치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 한국사에 등장한 최태민이라는 인물의 어두운 그림자가 오늘날 어처구니없는 ‘최순실 파동’으로 이어졌다. 그 딸에 이르기까지 국정을 앞세워 사리사욕을 도모한 정황이 끊임없이 밝혀지고 있다.

무소불위로 잘 나가던 시절은 불과 4년이 안되는데, 행정당국은 이제 최태민의 무덤까지 원상복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집안사람들이 수두룩하게 수감된 상황이니 당국의 명령을 실행할 사람조차 찾기 어려운 지경이다.

국권으로써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할 때의 위험성이 이와 같다. 2300년 전 여불위 시대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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