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초까지 서울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삼륜트럭.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48] 한보와 기아의 부도는 비슷한 때 벌어진 일로,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가 마침내 폭발한 계기로 지적되고 있다. 이미 위험요인이 가득했던 한국 경제에 기폭제가 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보와 기아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단적인 예를 당시의 언론 보도가 전하고 있다. 외국계 은행들의 피해다.

한보가 부도났을 때 부실대출을 가진 외국계 은행은 한 곳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 보도가 그렇다. 반면 기아 부도는 이들에게도 상당한 부실대출의 피해를 줬다.

기사를 보면서, 몇몇 사람들은 “잘난 척 하더니 저들도 별수 없다”고 냉소했다.

하지만, 기아에 외국은행들도 물렸다는 건 더 큰 후폭풍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당시까지도 한국경제가 갖고 있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한강의 기적’이었다. 1960년대 국민소득 100달러도 안되던 나라가 1970년대의 고도성장을 이뤄 남북한 경제 우열을 역전시킬 뿐만 아니라 1990년대 11대 경제대국으로 자리잡는 밑받침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브랜드들이 4대재벌, 10대재벌, 20대재벌이었다.

그런데 한보는 1980년대에 서울 강남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급성장한 기업으로, ‘한강의 기적’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아니라 정경유착으로 등장한 신흥재벌이었다. 이런 기업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한강의 기적’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기아는 한보와 차원이 달랐다. 1960년대 삼륜트럭을 만들어 무수한 산업물자를 실어 날랐고 1970년대에는 승용차 브리사를 만들었다. 4대재벌은 아니라도, 1970년대 고도성장의 한 축을 담당한 기업이었다.

기아와 같은 재벌까지 문제가 있다면 이제 ‘한강의 기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특히 은행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부실대출이다. 그걸 끌어안게 된 외국 금융기관들로서는 한국 경제 전체에 대해 더 큰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외국 사람들 시각보다도 한국인들부터 ‘한강의 기적’이 상처받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물론 그 때까지는 그것이 외환위기를 초래한다고 예상치는 못했다. 단지 국가의 자부심이 손상당하는 것이었다. ‘국민 기업’이라는 어휘는 그런 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국민타자’ ‘국민배우’ ‘국민여동생’과 같은 ‘국민-’이라는 접두사를 처음 쓴 것이 기아자동차의 ‘국민 기업’이다. 이는 기아의 부도처리나 다른 재벌의 흡수합병에 반대하는 논리로 쓰였다.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은 모 그룹 계열 금융사가 기아자동차 사태가 나기 전, 기아를 깎아내리는 보고서를 쓴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그 재벌이 자동차 진출을 시도하면서 기아 인수를 노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대중들의 눈과 귀는 기아보다 한보에 더욱 집중됐다. 한보사태로 국회 청문회까지 열렸다.

근무시간 중 휴게실에서 간간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쉬고 있던 사람들이 생중계되는 청문회를 보면서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봤던 것이다.

핵심증인 정태수 한보 회장은 마스크까지 쓰고 나와 대부분 질문에 묵비권으로 일관했다. 한 의원은 정태수 증인에게 “눈도 좀 똑바로 뜨고”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 청문회는 크게 건진 것도 드물고, 시청률 또한 6% 안팎의 부진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막판에 큰 변수가 생겼다. 남성클리닉의 원장이 등장해 좌충우돌 증언을 하면서 13%를 넘겼다.

그는 여당의원이 “잘 나가는 사람한테 붙었다가 배반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하자 “의원님은 나라를 위해 한 게 뭐가 있느냐”고 맞받아쳤다.

언성을 높이는 국회의원한테는 “호통 치지 마세요”라고 맞섰다. 이 장면을 본 국민들은 내용을 떠나 “통쾌하다”고 격찬했다.

그에게서 반격당하는 모습을 TV 화면으로 드러낸 여당의원들은 국회모독죄로 고발하려고 했지만, 상대적으로 ‘피해 규모’가 적은 야당 의원들의 협조를 받지 못했다.

전해 연말부터 노동법 파동으로 뒤숭숭한 나라였다. 이 조차 제대로 해결을 못하고 있는데 굵직한 기업들의 부도가 겹쳤다. 여기에는 대통령 일가가 깊숙이 개입해 국정을 농단한 흔적이 발견됐다. 해결은커녕 더 한심한 국가 체계만 매일같이 새롭게 드러났다. 청문회장의 ‘용감한 의사’ 소동으로 좌절한 국민들이 일시적인 심리치료를 받는 꼴이 됐다.

이것이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반년 전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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