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49] 내가 산업은행을 다니는 동안 총재를 지낸 김시형 씨는 인상부터 ‘귀인지상’의 용모를 갖췄다. 당시 행원들끼리의 수다에서 워낙 유복하게 자라 돈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가 은행 총재에 취임하기 직전, 산업은행은 사상 처음으로 전임 총재가 오직사건으로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이런 불상사가 있었으니 정부는 특히 처신에 소홀함이 없는 사람을 골랐을 것이다.

간혹 떠도는 얘기로는, 지나치게 신중해서 산업은행 조직 개편을 정부에 요청하는 걸 주저했다고도 한다.

예전 어떤 총재는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자”며 행원들과 직접 대화에 나서기도 했는데, 김시형 총재에게는 이런 면모는 별로 없었다.

은행사람들은 총재에 대해, 별로 아쉬울 것 없이 살아온 분이 총재로 부임해서 무난하게 지내려는 분 정도로 생각했다.

인생 무탈하게만 사는 줄 알았던 분이, 조간신문에 온갖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한보그룹 부도처리가 발표된 날이다. 이렇게 귀한 인상에도 저런 표정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김시형 총재의 깊은 수심에는 더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한참 지난 나중에 알려진 일들이다.

한보부도 청문회에서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산업은행이 3000억원 추가대출을 해주지 않아서 그룹이 망했다”고 강변했다. 정경유착과 뇌물로 인해 국회 청문회까지 초래한 마당에 여전히 엉뚱한 핑계를 대고 있었다.

산업은행이 추가대출을 해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김시형 총재의 결단이었던 것이다.

▲ 한보그룹에 대한 추가대출을 거부한 김시형 전 산업은행 총재. /사진=국무조정실 홈페이지.

당시 언론이 후일담을 전한 내용에 따르면, 김 총재는 한보그룹의 경영행태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됐다. 철강기업의 경영을 공부하기 위해 그는 직접 헬기를 타고 포항제철을 찾아가기도 했다.

마침내 한보그룹의 경영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

더 이상 대출을 하지 않는 것은 한보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그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전의 대출이다. 김시형 총재를 비롯한 은행간부들 또한 책임을 져야 했다.

어느 산은 총재나 마찬가지로, 그 또한 산은 총재에 부임할 때는 장관이 돼서 관가로 복귀하는 꿈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다. 산업은행이란 좀체로 커다란 사건이 나지 않는 곳이어서 무난히 임기를 마치면 많은 총재들이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하지만, 한보그룹에 대한 추가 대출을 끊으면서 그는 장관 입각의 꿈을 내던졌다. 한보는 이미 ‘밑 빠진 독’이어서 여기에 계속 돈을 쏟아 부었다가는 국가가 결딴난다는 위기의식이 개인의 꿈을 앞선 것이다.

당시 일을 전하는 사람의 얘기로는, 결단을 마친 김 총재는 부총재를 불렀다고 한다.

“혹시 한보로부터 받은 것 있소?”

“없습니다. 총재님은 있습니까?”

“나도 없소. 그렇다면 우리 여기서 끊읍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입각’과 ‘부총재 연임’의 꿈도 함께 끊었다.

때로는 순간의 갈림길에서 옳은 판단을 내렸지만, 상황논리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때가 있다. 한보 대출을 거부한 김시형 총재의 처지가 이랬다.

한보의 부도는 제일은행을 거덜 내고, 한국 경제에 ‘IMF 외환위기’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금에 이르러 돌이켜보면 만약 산업은행이 추가대출을 했다면, 그 파괴력은 더 한층 커졌을 것이다.

김시형 총재의 결단이 한국의 경제상황을 더 큰 지옥에서 건져냈음에도, 그는 호평이 아니라 이전 대출에 대한 책임 추궁에 직면해야 했다.

당장 은행 내에서도 ‘용퇴하시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산업은행 특성에 이런 주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달 쯤 지나, 한보와 관련해선 은행이 일상으로 돌아간 듯 했다.

이 때, 그는 강경식 경제부총리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김시형 총재는 은행을 떠난 후 관계나 금융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면서 줄곧 야인으로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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