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김시형 산업은행 총재의 사의 표명을 전하는 한겨레 신문 1997년 5월21일자. 기사를 쓴 기자는 유상규 현 주택금융공사 이사다.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50] 한보 사태가 진행되고 김시형 산업은행 총재는 아직 거취를 표명하기 전의 일이다.

은행 노조가 총재 퇴진을 촉구했다. 산업은행 노조는 한보 사태가 나기 1년 전쯤 선거를 통해 강성 노조로 바뀌어 있었다. 이 노조가 첫 번째로 주력한 것은 1996년 봄의 임금협상이다. 파업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산업은행에서는 전례를 찾기 힘든 행원들의 조직력을 과시하면서 노조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해 연말 노동법 파동이 온 나라를 강타한 것을 보면, 운명의 신이 이런저런 일들을 앞두고 산업은행 노조도 이런 시국에 맞는 모습으로 바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1997년 봄 김시형 총재의 퇴진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강경한 ‘투쟁’을 벌인 건 아니다. 노조의 원칙에 비춰 ‘이런 일이 났으면 우리는 절대 좋은 소리 못 한다’는 차원의 퇴진 촉구였다. 김시형 총재 또한, 결과적으로 자신의 거취에 대해 구차한 모습은 전혀 남기지 않았다.

노조는 1년 전 임금 협상 때 만들어 놓은 부서 단위 대의원 조직이 있어서 이것을 통해 행원들의 퇴진 서명을 모았다. 내가 있던 외화자금부에서도 대의원을 맡은 동료 행원이 서명지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서명을 받았다.

나는 이 사람에게 “퇴진까지 요구하는 건 너무한 거 같아”라고 말했다. 그는 “그래? 알았어”라며 바로 다음 사람을 찾아갔다. 강압은 고사하고 권유하는 분위기조차 전혀 없이 그냥 서명지가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엉뚱한 소동을 일으켰다.

그날 오후였다. 우리 부서를 맡고 있는 임원, 즉 당시 직함으로 부총재보가 우리 사무실에 나타나 행원들을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임원은 매우 격앙돼 있었다. 그의 얘기로는, 그가 맡고 있는 국제부서들 가운데 유독 외화자금부에서만 총재 퇴진 서명이 30명이나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원들에게 호통을 치기 위해 이렇게 8층에서 15층으로 올라온 것이다. 입행 이후 그 때까지 1년 반 동안 그를 우리 사무실에서 본 것은 이번이 두 세 번째인 듯싶었다.

물론, 서명한 사람을 색출하겠다는 따위의 완전히 몰상식한 일은 없었고, 나는 서명도 안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신경을 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회의실에 앉아서 그가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불쾌했다. 이런 것 하나 자연스럽게 넘기지 못하고, 큰일이나 난 것처럼 촌티를 내는 사람들이 무슨 국제금융을 하나. 이 자리 끝나면, 아까 안한 서명 해야겠다고 자청을 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나는 그 때 두 번째로 유학을 가려고 보냈던 입학 지원서 가운데 하나가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조만간 은행을 떠날 생각을 굳혀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임원이 호통 치는 옆에 눈길 가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부서의 정형배 부장이었다.

상급자인 임원이 사무실을 방문했다고 해서 그는 양복 상의까지 갖춰 입고 옆자리를 지켰다. 30분은 넘게 걸린 회의로 기억나는데 긴 시간동안 정형배 부장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임원이 와서 저 난리를 치면, 부장은 마지못해서라도 편승하는 한마디는 할 것 같았다. 부장들 중에는 이럴 때 오히려 임원보다 더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정 부장은 단 한번 입조차 열지 않았다.

나는 이 장면을 그가 임원에게 무언의 항의를 한 것으로 지금도 해석하고 있다.

정형배 부장은 내가 은행 생활을 하는 2년 동안 내내 나의 소속 부장이었다. 그러나 처음 1년 3개월 동안은 동급인 외화자금실장 위의 국제영업부장으로, 외화자금실이 있는 15층이 아니라 3층 국제영업부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조직개편으로 외화자금부가 만들어질 때, 부장자리에 상당한 경합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경쟁에서 이길 만큼의 은행 내 실력도 갖고 있었다.

3층에서 합류한 직원이 나에게 귀띔해준 바로는, 그는 행원과 얘기해봤는데 전혀 업무파악 못한 표시가 나면 바로 눈밖에 내놓는다고 했다.

그걸 알고도, 나는 그만 이런 테스트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언젠가 담당 대리와 함께 부장실로 불려 들어가 업무와 관련된 얘기를 했었다. 내가 뭔가를 얘기했는데, 사실 나부터 잘 모르지만 대답은 해야 돼서 꺼낸 말이었다. 그 때 부장은 몸을 크게 젖히고 약간 측은하다는 각도의 눈썹으로 나를 쳐다봤는데, 이게 바로 다른 직원이 얘기해 준 ‘눈밖에 내놓는’ 모습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후 부장실로 불려 들어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부장의 태도가 다시 나에게 약간 호의적이 된 건, 조금 시간이 지나서다. 새로 생긴 부서의 화합을 살리고, 외화자금부 특성을 더한다고 해서 기간별 환율 알아맞히기 행사가 만들어졌다. 이걸 주관하는 게 내 일이 됐다. 약간 헛소리를 더해 공지문을 만들어 벽에 붙이면, 사람들은 오다가다 읽으면서 낄낄거렸다. 부장은 아마 내가 글 쓰는 것하고 직원들 스트레스 푸는 일에는 약간 쓸모가 있다고 본 듯 했다.

이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났다. 조간신문에서 당시 우리 부서를 담당하는 임원이 퇴진한다는 기사를 봤다. 그 때 부장을 대동하고 회의실에서 우리들에게 호통 쳤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오늘날 이리 될 일이라면, 뭣 하러 굳이 그런 인심 잃는 장면을 보였을까. 그는 그 후 제2금융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취재를 마치고 퇴근하다 길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전에 산업은행에서 모시고 일하던 장경순 기자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는데 은행시절과 달리 그는 이제 흰머리가 가득했다. 부장들보다도 더 젊어 보이는 부총재보였는데 2년 동안 이렇게 모습이 변했다.

그의 명함을 받아들고 헤어지고 나니, 예전에 칼국수 많이 주셨던 분이란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언젠가 은행 근처의 유명한 대련집에서 이 분이 행원들에게 밥 한번 사는 자리가 있었다. 유독 칼국수가 많이 담긴 그릇을 주저 없이 나한테 넘긴 일이 있었다. 외환위기라는 폭풍이 오기 전 훈훈한 은행 생활을 할 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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