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은 달라도 사람을 아끼는 것이 보수의 최대 덕목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전두환 시대 대학을 다닌 ‘386(지금은 586)’ 세대라고 해서 모든 학내 시위를 다 참여한 건 아니다.

500명 규모의 일상적인(?) 교문 투쟁은 총학생회 중심의 소수 핵심 학생들만 나섰다. 특별한 일이 터져서 한 학교에서 3000명 정도가 집계되는 그런 날은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 학생들이 직간접적으로 동참했다고 봐야 한다.

낯선 사람과 스크럼을 짜고 한참 기세를 올리고 교문으로 접근하다보면 투구와 방패벽으로 무장한 전투경찰들의 대열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들이 바라는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슬슬 겁도 나기 시작했지만 슬그머니 빠져나가기는 멋쩍은 노릇이었다.

그 때, 일종의 환청 비슷한 것을 겪게 된다. 잘 아는 어른 누군가가 나서서 “이놈아, 왜 너까지 거기 있어? 밥은 먹었냐”라고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오늘 여기서 다치면 우리 집안 어른들이 얼마나 상심하고 슬퍼하겠냐는 처량한 생각도 순간 찾아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 모든 학생들이 바로 다 흩어졌다면, 오늘날 한국사에서 5공시대 학생운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런 순간의 심상은 지금은 비록 공권력에 대해 투석을 교환하는 격한 행동을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그래도 다 같은 이웃이고 가족이다’라는 공감의 끈을 남겨놓았다. 당시에 격렬한 민주투쟁을 한 사람들이 훗날 보수 성향으로 바뀌는 기본 토대는 그런 심성에 있는 것이다.

가두시위에 나선 학생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에 나서면 학생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골목 안 음식점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주인들은 얼른 셔터를 내리면서 뛰어 들어온 학생에게 물과 간단한 음식을 내줬다. 그리고는 훈계가 시작됐다.

“데모 좀 그만해. 장사가 안돼서 못 살겠어!”

교내시위가 아주 격해져서, 학생들은 건물 안에서 농성하고 경찰은 건물을 포위한 채 심야 대치하는 사례도 있었다. 몇몇 용감한 교수들이 갇힌 학생들에게 빵과 우유를 전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여교수 한 분이 나서서 “자식도 가족도 없냐”고 호통을 치면, 진압대장도 못 이기는 척 물러나곤 했다.

어느 대학 전설의 명총장으로 유명했던 분은 이런 때 학생과 경찰 모두에게 간식을 돌렸다고도 한다.

보수적 심성을 대표하는 단 한마디는 “밥은 먹고 다니냐”다. 이 말에 담겨있는 가장 깊은 뜻은 어떻든 사람은 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뭐를 하든, 일단 사람이 멀쩡해야 다음날이 있는 것 아닌가.

최근 한국 정치권에서 이런 보수의 심성에 가장 근접했던 정치인은 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한나라당 국회의원)이다.
 

▲ 3선 국회의원 시절의 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 /사진=뉴시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 출신이지만, 5공 신군부와는 종류가 다른 사람으로 분류된다. 요즘 청와대의 민정수석이란 자리가 많은 말썽을 일으키는데 김 전 장관은 5공 말기에 이 자리를 맡았다. 그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 ‘땡전뉴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라고 직언을 한 게 이 자리에 있을 때다.

그가 17대 국회에서 3선의원을 할 때 국회에는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의원 10명이 진출했다. 10명 중 두 명의 지역구 의원이 있었다. 울산의 조승수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할 위기에 몰렸다. 법원에 선처를 바라며 ‘조승수 지키기’에 나선 21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도 포함됐다. 그는 몇 달 전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을 지켜야 한다는 연설을 하다가 졸도까지 했었다. 국보법 폐지를 가장 강경하게 주장하는 민주노동당 의원에 대해서도 ‘사람은 다치지 말아야 한다’는 보수의 심성을 제대로 보여줬다.

보수는 투박한 심성이 앞서다보니 번지르르한 말솜씨와는 좀 거리가 멀다.

그런 모습은 ‘썰전’에 등장하고 있는 전원책 변호사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평소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함께 유쾌한 입심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꽤 높은 인기를 끌어 모은 전 변호사인데, 신년 생방송에서 그만 ‘버럭’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시비를 자초했다.
 

▲ JTBC '썰전'의 전원책 변호사. /사진=JTBC 동영상 화면캡쳐.


무조건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사실 보수의 성향이 갖고 있는 투박한 또 하나의 단면이다. 보수의 설득력은 논리성보다,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하게 된 인생 과정은 무언가”와 같은 배경 상황에 있다.

보수가 진보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보의 홈그라운드에 뛰어올라가서는 열 번을 싸워 단 한번을 이기기 어렵다. “밥은 먹었냐” “사람은 다치지 말아야” 이 두 마디 말로 논리정연한 상대의 공세를 한 시간 넘게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 변호사와 유 전 장관은 생방송 후 다시 ‘썰전’에 돌아와 원래의 구수한 입씨름 모드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전 변호사의 ‘버럭 구설’이 또 요리거리가 됐다.

보수의 성향이 원래 이런 것이니, 재치 있고 기발하게 치고나가는 문화 예술영역과는 궁합이 안 맞는다. 왕조시대에도 온갖 재담이 만발하는 판소리와 같은 대중문화는 필연적으로 권력에 비판적인 속성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보수 세력들이 항상 유력한 승세를 앞세워 선거를 치르다 보니 이른바 ‘캠프’에 적을 두는 인간들이 차고 또 넘쳐났다. 선거를 이기고 논공행상을 하려는데 사람 수가 자리에 비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문화예술 영역을 만만하게 봤던 모양이다.

태생적으로 진보성향이 앞설 수밖에 없는 문화예술 분야에 억지로 보수를 이식하려니 ‘블랙리스트’ 파동을 초래하고 말았다.

보수란 원래, 그 잔소리를 듣는 순간은 짜증 날수도 있지만 오래 지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본연의 ‘사람 아껴주는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보수가 가장 추해지는 것은 ‘사람 아끼는 마음’을 내던졌을 때다.

자기 자리 하나 더 차지하려고 이미 잘하고 있는 사람에게 ‘종북’이니 하는 딱지를 붙여서 밥그릇 뺏고 살기까지 부릴 때 보수는 추해진다.

야당의 유력정치인이 있는 자리에서 차가 지나가지 못하게 길을 막고 폭언과 폭행을 한 사람들을 절대로 보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불온 세력들의 그런 행태를 배격하려고 보수를 하겠다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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