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초의 지지층이 탄탄하기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을 훨씬 압도했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 자체를 기록적인 표차로 누르고 제1야당을 3분의1 의석 아래로 떨어뜨렸을 정도로 집권 초 그의 지지도는 심리적으로 3분의2 이상에 달했다. 그랬던 사람의 결과는 오늘날 뉴스를 통해 익히 드러나는 초라하기 이를데 없는 수준이다.

 
이명박 정권의 참 이상한 특징은 그토록 방대했던 지지층이 별로 마음에 안들었는지 자꾸 정권에서 마음이 떠나가게 하는 일들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난데없는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한 도발이었다.
 
2008년 기획재정부가 10만원권 도안의 독도 문제를 이유로 발행 연기를 발표했지만 사실은 독도 때문이 아니라 백범을 최고액권에 담기 싫어서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보다도 이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 상당수는 사상 논쟁이니 하는 것보다 오로지 실용적인 경제를 살려줄 것이라 기대를 했던 건데, 이명박 정권은 뜻밖에 60년전의 임시정부 정통성 논란부터 다시 벌인 꼴이 됐다. 여기서부터 방대했던 지지층이 떠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 최고액권의 인물이 신사임당이 되고 말았는데, 사실 신사임당은 10만원권에만 관심이 쏠린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5만원권 인물로 정해진 측면이 강하다. 여성이 하나 필요하다 해서 선정됐지만 정작 여성계 자체에서도 ‘반(反) 여성적’이라며 공감을 못했다. 더욱이 이미 그의 아들 율곡 이이가 5000원권 인물인데 또다시 신사임당까지 화폐 인물이 되니 대한민국 화폐에는 이씨 집안 사람 아니면 안되냐는 비아냥도 나오고 있다.
 
현존 최고액권인 5만원권은 또 도안 자체도 커다란 문제를 갖고 있다. 5000원권과 너무나 비슷한 것이다. 나도 실수로 가게에서 5만원권을 5000원으로 착각해 값을 치르려다 고맙게도 가게 주인이 알려줘서 큰 손해를 피한 적이 있다. 어느 날은 택시기사가 거스름돈 5000원을 실수로 5만원권으로 주는 것을 사양했더니 기사는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라며 감사해했다. 만약 그 돈을 그냥 쥐고 내렸으면 그 기사는 하루 영업이 완전히 헛수고가 됐을 것이다.
 
한국은행이 10만원권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다보니 5만원권에는 다소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10만원권은 엉뚱한 도발을 받으면서 탄생조차 못하게 됐다.
 
여기서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이 앞선 이명박 정권에서 상실한 지지층도 되찾고 통화정책에도 나름 기여할 일거양득의 제안을 한다.
 
5만원권의 도안을 이미 제작해 둔 백범 김구 선생의 10만원권 도안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우선 실용적으로 5만원권은 도안 변경이 시급하다. 몰라서 약이지 아마 자신도 모르게 5만원을 5000원으로 주고받은 사례가 수도 없을 것이다. 최고액권 도안이 액면 10분의1 지폐와 흡사하다는 것은 시급히 고쳐야 할 문제다.
 
그리고, 10만원권과 관련해서는 현재의 검은 돈 시비와 물가까지 감안한다면 과연 발행이 바람직한 것인지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5만원권 발행은 이미 한국의 풍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조사 비용의 심각한 인플레를 불러왔다. 10만원권이 발행되면 경조비 부담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또 검은 돈의 폐해도 문제다.
 
그래서 10만원권 발행 자체는 연기가 아니라 아예 포기를 하고 그 대신 이미 작업해 둔 10만원권의 도안을 5만원권으로 옮겨서 쓰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씨 집안의 전유물이냐는 화폐인물 논란도 크게 해소되고 또 유가(儒家) 일변도라는 지적도 완화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국민이 가장 원했던 인물 백범을 국민의 뜻대로 이 나라 최고액권의 법화에 모시게 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게 없다”라는 망발이 나오는가 하면 일부 인터넷 공간에서는 “김구는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매국노발언까지도 돌아다녔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공부하면 백범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건국 대부라는 뿌듯한 민족사를 체감하게 된다.
 
1930년대 들어설 때만 해도 아시아 사회에서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한 패라는 인식이 만만치 않았다. 하마터면 한국은 제2차대전 종전후 전범국가 취급을 받을 뻔했다는 얘기다.

이런 왜곡에 처음으로 일타를 날린 것이 1932년 이봉창 의사의 일본국왕 살해 미수였다. 곧 이어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 최고위 장성들을 한 순간에 처단한 것은 중국의 장제스 총통으로부터 “백만의 대륙군대도 못한 쾌거를 조선의 한 젊은이가 해 냈다”는 격찬을 이끌어냈다.
 
 
이는 모두 백범이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거사였다. 이제 한국은 절대로 일본과 한 패가 아닐 뿐더러 침략자들에게 맞서는 연합세력의 일원임을 알렸던 것이다. 마치 드골의 프랑스 군이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도 영국의 연합군 대접을 받듯, 임시정부는 중국으로부터 동맹국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성과는 그 후 장제스 총통이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 등 연합국 정상들과의 회동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설파하는데 큰 밑바탕이 됐다.
 
만약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장거가 없었다면 한국은 무엇으로써 우리가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사람들이라고 세계를 설득할 수 있었을까.
 
일제 강점기의 독립투쟁에서 일각에서는 오직 홍범도 장군과 같은 좌익 계열만이 무장투쟁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런 주장을 단 한번에 일축시키는 것이 백범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존재다.
 
이런 분을 무슨 연유에선지 국민들과 자꾸 차단하려는 일이 앞선 정부 5년 동안에 벌어졌고 그것은 지금의 박근혜 정부조차 회복 못하고 있는 이탈 지지 세력을 만들어냈다.
 
혹자는 초대 대통령을 하다 4.19 혁명으로 축출된 이승만의 후계 세력들 입김 탓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승만을 재조명하려면 당사자의 공과를 좀 더 열심히 캐도록 노력을 할 일이지, 이미 국민 대다수가 가장 존경하고 있고 또 갈수록 국민적 존경이 결집되고 있는 백범에게 생트집을 잡을 일이 아닌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앞선 정권이 결례를 범한 백범 선생을 정부의 이름으로 제대로 모셔오는 노력을 한번 해 볼만 하다고 본다. 여기서 얻어지는 국민적 일체감의 상승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특히 현재의 어정쩡한 화폐 체계를 훌륭하게 손질하는 일과 결부된다면 더더욱 적극적으로 검토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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