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주 활개치게 놔두고 은행한테 돈부터 대라는 현실 서글퍼

필자는 구조조정 시리즈를 마무리하기 위해 최근 한 대형 시중은행 L모 부장(50)을 만났다.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 은행들이 처한 상황을 실무자에게 직접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L부장의 대답은 필자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금융당국이 부실기업 오너와 경영진의 책임은 추궁하지 않은 채 은행들에게만 손실부담을 강요해 은행권의 구조조정 참여의지를 꺾어놓고 있다는 것이 그의 하소연이었다.
 
L부장이 전한 금융권과 한국경제의 실상은 대략 이렇다.
 
최근들어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미국 통화당국의 양적완화(돈풀기정책) 출구전략 공포까지 더해져 한국 경제계에선 부실기업들이 잇따라 쓰러지는 동시에 부실징후기업도 늘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또한 금융당국의 은행을 대하는 태도도 엄격해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부실기업 지원을 결정하는 은행 여신위원회 멤버로 은행장이 포함되지 않았으나 올해부터는 은행장도 이 위원회에 반드시 참여토록 행정지도가 이뤄지고 있다. 부실기업이 발생해 협조융자가 필요할 때 각 은행장이 “여신 문제는 내 권한사항이 아니다. 나 또한 여신위원회 결정에 따를 뿐이다”며 발뺌하는 경우가 늘자 금융당국이 “그럼 은행장도 여신위원회 멤버로 들어가라”고 강요하면서 은행장들도 꼼짝없이 주요기업 여신 결정에 참여하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이같은 당국의 행정지도는 일견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고 L부장은 전했다. 부실기업을 구조조정 하는 일 또한 채권단의 주된 업무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도 많다고 했다. 현 정부들어 은행권의 책임만 강조할 뿐 구조조정과 관련한 ‘컨트롤 타워’가 없어 부실기업마다 서로 다른 구조조정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부실기업정리와 관련해 은행책임만 강요할 뿐 망한 기업의 오너나 핵심 경영진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는 경우가 늘어 은행권을 더욱 화나게 하고 있다는 게 L부장의 전언이다.
 
L부장은 그러면서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 정부 주도로 구조조정을 할 땐 우선 부실 기업 경영진에 대해 재산상 책임부터 묻고 난 뒤 정부와 채권단이 나서 해당 기업 회생절차에 나섰던 것처럼 지금부터라도 ‘先부실기업 책임부과, 後 채권단 회생지원’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구조조정의 공식을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울러 “정부가 채권단에만 구조조정을 맡기다보니 일반 시중은행들은 발뺌하고 애꿎은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만 부실기업 문제로 진땀을 흘리고 있다”며 “이 또한 정부가 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고 지적했다. 이제 범정부가 나서서 구조조정 컨트롤 타워를 세우고 일관된 원칙아래 일사불란하게 부실기업 및 부실징후기업을 정리해 나갈 때가 됐다는 게 L부장의 진정한 충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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