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노무현 정부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재벌 기업의 ‘지배구조 매트릭스’를 처음 발표했다. 공정위 공보관은 당시 정부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몇몇 언론, 특히 A일보가 곱지 않게 보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의 A일보 보도는 그에게 전혀 뜻밖이었다. 이른바 진보를 강조하는 몇몇 언론은 따라올 수도 없게 상세하고 알기 쉬운 보도로 순환출자의 폐해를 강력히 질타하고 있었다.
 
A일보는 공정위의 두 번째 매트릭스 발표 때도 같은 논조를 유지했다.
 
순환출자는, 뭣도 모르고 떠드는 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심각한 아킬레스건이라는 한 방증이다.
 
이른바 ‘진영 논리’의 관성에 파묻혀 있지만, 실제로는 재벌들 스스로 순환출자의 폐해를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간혹 들려오기도 한다. 미래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것이다. 4대 재벌 가운데 한 곳은 이미 순환출자를 완전 해소한 상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순환출자를 해소하지 않았을 때의 위험도란 무엇일까. 소위 좌파 정권이 집권해서 순환출자 해소하라고 핍박하는 건 그저 5년을 버티면 그만이다. 이런 건 위험이라고 할 것도 없다.
 
순환출자의 진정한 위험이란, 재벌 계열사 중에서 멍청한 곳 하나만 적대자본 손에 넘어가면 굴지의 주력기업까지 전부 다 경영권을 뺏기게 되는 것이다. 바로 2003년 SK-소버린 사태다. 2004년말의 헤르메스-삼성물산 사건도 순환출자 문제다.
 
1990년대까지는 한국의 재벌들이 적은 자본으로 다각적인 사업에 진출하는 수단으로 순환출자 자본을 형성해 왔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에 대한 폐해를 해소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런 노력을 등한히 한데 대한 첫 번째 경고가 소버린과 헤르메스 사태다. 이것을 방치하다가 휴대폰이나 반도체, 자동차 등 국가 주력 기업이 투기자본 손아귀에 넘어가면 ‘제2의 IMF’를 각오해야 한다.
 
문제는, 기업의 얽히고설킨 거미줄 지배구조를 단순 수직구조로 바꾸는 과정에서 자본력이 필요하고 자칫 핵심 정보가 적대세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와 재벌의 허심탄회한 정보 공유가 절실하다. 
 
7년전 당시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이 이 문제에 접근했을 때는 정부와 재벌 사이의 신뢰가 여의치 않았다. 지금의 새누리당인 한나라당 소속 남경필 의원은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방 안보처럼 경제도 안보가 중요하다”며 열린우리당의 순환출자 해소 노력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남 의원은 지금 새누리당에서 순환출자 해소를 추진하는 대표의원으로 변신해 있다.
 
재벌들은 이같은 상황 변화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새겨야 한다. 그나마 재벌들과 깊은 대화가 가능한 정파가 집권해 있다면 오히려 지금이 미래의 화근을 근본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2005~2006년 당시 참여정부의 순환출자 해소 방식에도 유감스런 점이 없지는 않았다. 이 문제의 주무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번 “회장의 1주는 다른 주주 7주에 해당한다”는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
 
신문사들은 처음에는 매체의 논조를 불문하고 정부의 노력을 전달하려고 부심했지만 식상한 방식에 국민적 관심은 가라앉고 말았다. 공정위의 매트릭스 발표 3회부터는 지배구조 개선이 돋보이는 재벌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이 달라졌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배구조가 우량해지면,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시장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게 돼 있었다. 최소한 2005~2006년의 시장은 그런 매카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했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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