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칼럼] 좌우의 내관과 상궁들이 모두 혼비백산해 달아나고 편전으로 가는 길이 텅 비었다.

위풍당당하게 갑옷을 차려입고 이날의 반정을 총지휘한 박원종이 전각으로 올라섰다. 용상에 이 밤 안으로 쫓아내야 할 임금이 앉아있다. 이제 지켜주는 이 하나 없는 필부와 다름없지만, 열 두 해 이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다. 마지막이나마 신자의 몸가짐을 안 할 수 없다.

묵직한 심야의 공기 속에서 왕이 말문을 열었다. “원종아 네가 반역할 줄은 차마 몰랐다.”

원종이 답했다. “전하께서 덕을 잃어 천명이 진성대군에게 돌아갔습니다.”

진성대군은 왕이 청소년이 될 때까지 동복동생인줄 알고 자란 이복동생이다. 날이 밝으면 즉위해 중종이 되는 사람이다.

“오오 진성! 그렇다면 나도 안심이다. 나는 원종이 네가 왕이 되려는 줄 알았다.”

왕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원종아 옥새를 네게 내어줄 수는 없다. 대신들은 모두 죽였니? 어서 대신을 불러와라.”

이리해서 이미 반군 편에 가담한 우의정 김수동이 불려왔다.

김수동은 왕을 보자마자 “노신이 죽지 못해 차마 이 꼴을 보옵니다”며 통곡했다.

왕은 “우상(右相)이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소”라며 옥새를 내어줬다. 한밤중에 반정군의 기습을 받은 왕의 퇴위 절차는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는 본인 스스로 마무리했다.

담담한 인물 묘사가 너무나 강렬한 연산군의 마지막 모습이다. 과연 이렇게 정신이 맑은 사람이 한국사에서 고려 충혜왕과 함께 최대 폭군으로 비판받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100% 사실이 아닌 소설 속의 장면이다.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가 전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월탄의 필력이 너무나 흡입력이 강해 이 장면을 실제 역사로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럼 실록 속의 실제 상황은 이와 전혀 다를까.

결론은 월탄이 전하는 연산의 마지막 충심이 실제 역사에도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중종 1년 9월2일의 반정 기록에는 반정군의 유순 등이 의논하기를 “마땅히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가서 고하기를, ‘인심이 모두 진성에게 돌아갔다. 사세가 이와 같으니, 정전(正殿)을 피하여 주고 옥새를 내놓으라’ 하면 반드시 이를 좇을 것이다”고 했다.

승지 한순과 내관(內官) 서경생이 창덕궁의 왕에게 가서 고하니, 왕은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며 시녀(侍女)를 시켜 옥새를 상서원 관원에게 전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반정군이 연산군에게 ‘진성대군을 옹립하겠다’는 뜻을 우선 확실하게 밝혔다는 점이다. 연산이 절망적인 저항을 하지 않고 대세에 순응하도록 하려면 진성대군, 즉 중종의 즉위가 필요했음을 반군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성대군의 승계가 의미하는 것은 이날 밤의 반정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아니라는 점이다. 연산은 조선이라는 국가가 망하는 건 아님을 보장받으려는 것이었다.

용상에서 쫓겨나는 임금의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의 안위뿐만 아니라, 대대로 내려온 왕조의 운명이다. 임금에게 가장 큰 죄악은 열성조의 왕업을 자신의 대에서 끊는 것이다.

연산이 비록 열 두해 재위기간의 8년을 폭정으로 지샜지만, 마지막 순간에서는 그 또한 여타 임금과 똑같은 심정을 드러냈다.

단 하나 요구조건이 충족되자, 연산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옥새를 건네줬다.

혼군(昏君)마저 물러나는 순간엔 또렷한 정신으로 국가를 위해 마지막 할 일을 하는 모습에서 대중들은 그동안 살벌하게 들고 일어섰던 결기가 느슨해지는 법이다.

연산군이야 태생의 굴곡으로 본인도 부정하지 않는 폭군의 길로 파고들었지만, 이는 극단적인 경우다. 다른 폐출된 임금들은 역사 기록의 행간에 논란의 여지를 가득 남겨두고 있다.

저마다 억울할 사연도 많고 역사가 전하지 않는 나름의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금은 이런 여염 필부의 심정을 뒤로 물릴 줄 알아야 ‘그래도 한 때는 천명을 받았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보다 오늘 당장, 그리고 내일 국민과 국가에게는 어떤 것이 이로운가를 먼저 헤아리는 것이 한 때 나라의 지도자였던 사람으로 보여줄 도리다.

특히, 남달리 몇가지 인상깊었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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