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칼럼] 요 며칠 서울 공기가 세계에서 몇 번째로 안 좋다는 뉴스가 나왔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이 이 기사의 링크를 자신의 페이스북 담장에 가져왔다.

몇몇 외국인들은 “이게 다 중국 때문”이라는 의견(?)을 달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알고지내는 다른 한국 사람들이 하는 말을 흉내 낸 것이다. 대부분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보기에, 물론 중국도 원인이지만 그보다 더 큰 원인이 한국 자체에 있는데 한국사람들은 쉬운 핑계를 중국에서만 찾는다고 꼬집고 있다.

서울에서 활동 중인 미국인 변호사는 열렬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다. 무슨 일이든 맹목적으로 중국을 편들 이유는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또한 서울의 미세먼지와 같은 대기오염에 대해서는 중국을 비난하기 전에 에너지 관련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주말 한 외국인이 한국생활에 대해 올린 글을 읽었다. 한국 생활에서의 어두운 면을 설명하겠다는 글이다. 글 쓴 이는 서두에서 한국이 멋있는 나라라는 점을 장황히 설명했다. 흠집 내기 위한 글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다른 외국인들을 위해서다. 특히 한국에 동화되고 싶은 의욕을 가진 외국인들을 위해 썼다. 외국인이 아닌 한국 사람에게도 이 글이 설득력을 지닌다면, 그것은 소위 ‘헬 조선’ 현상에 대해 제법 깊이 있게 분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지적에 나 또한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대화구조에 대해 생각해본 것들을 덧붙인다.

우선 외국인도 선진국 손님으로 대접받는 외국인과 ‘이주 노동자’간의 양극화 문제다. 이것은 외국인을 계급구조로 대하는 폐단까지 결부된다. 이 문제가 심각해지면, 한국인들에게 정당한 대접을 못 받은 국가의 사람들이 심각한 반한감정까지 갖게 될 것을 우려하게 된다.

공장에서 일하는 제3세계 국가 노동자들이 심지어 사장한테 구타당한 소식도 그리 드문 뉴스가 아니다. 반면 학원의 원어민 영어강사들이 비록 천국 같은 근로환경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원장한테 맞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머나먼 타국 땅에 와서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설움 받는 감정을 심어주는 것이 장차 어떤 업보를 가져올지 걱정되는 일이다.

인종문제에 대해 세계 보편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농담이나 비하가 아무 거리낌 없이 대화에 올라온다. 아직 어설픈 영어로 농담이라고 하는 것이 인종차별 발언이다.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들의 귀에는 더 많은 인종차별 발언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영어로 해서는 안 되는 얘기를 한국말로 하는 것은 괜찮다고 여기고 있다.

다음은 한국인과 외국인이 이원화된 생활 문화다.

내가 많은 내외국인 친구들과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강조하는 원칙이 있다. 한국 특유의 장유유서는 절대 강요해서는 안되고 지성인으로서의 상호 예의만 지키자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한국인에 대한 예법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정반대다.

오히려 한국에서의 모임에 한국인이 역차별 받는 일을 없애기 위해 만든 원칙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50세 한국인과 30세 한국인, 20세 미국인이 있는 경우다. 50세 한국인의 담배심부름을 누가 가야 되나. 열이면 열, 30세 한국인이 가게 된다. 현실이 그렇다.

누가 누구의 담배심부름을 가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자리라면 애초부터 이런 우스꽝스런 상황을 논할 필요도 없다.

직장이나 학업을 위해 한국에 온 외국인이 진정으로 한국인으로 동화되려고 한다면, 지금 현실에서는 이런 ‘복종문화’에도 동화돼야 한다.

한국 기업에서 일 할 때, 상명하복이 가져오는 낮은 효율성과 합리성 결핍도 감수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외국인에게 ‘유교문화’라고 설명하는 한국인이 상당수다. 그런데 유학에 대해 약간의 공부를 해 본 외국인들은 말도 안되는 억지변명이라고 지적한다. 공자는 수 백 년 동안 한국에서 전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비난받고 있다.

공중파 방송에서 외국인들이 동참하는 파티에 대해 난잡하고 문란한 자리에 한국 여성들이 동참한다고 보도해 당시 한국에 와있던 거의 모든 외국인을 격분시킨 적이 있다. 국수주의에서 출발한 편견이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다.

이런 험담에 맞장구치는 사람들은 사실은 그런 자리를 한 번도 구경해 본 적이 없다. 특정한 누군가를 두들겨 패는 다수에 가담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알고 합리적 판단 없이 그냥 비난대열에 동참한다.

내외국인의 파티에는 나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한국인 중에는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외국인들과 문란하게 놀아나는데 혈안이 된 한국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들 대부분이 9시를 전후해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럼 초저녁부터 고작 간단한 안주와 와인 한 잔 정도 마시는 이런 자리가 왜 여성들에게 더 관심을 끌까.

이런 자리는 윗사람 아랫사람 사이를 끊임없이 의식할 필요도 없고, 만인이 만인을 서로서로 뚫어지게 쳐다보는 과도한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억압적인 대화구조는 직장에서 창의력과 생산성 결핍을 초래한다. 특히 경쟁력 없는 상사들일수록 ‘상명하복’ 풍토를 앞세워 아랫사람들의 입을 막는다.

“너 몇 살이냐” 만큼이나 번역하기 어려운 한국말이 “무슨 말 대꾸가 그리 많냐”일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상황까지 담아낸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얘기한 이런 문제들은, 사실 외국인보다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에게 더욱 절망적인 것들이다.

우리 일상의 대화구조가 갖고 있는 합리성 결핍이 점점 더 커져서 이렇게 위아래가 꽉 막힌 조직문화까지 만들어낸다. 우리말 언어문화부터 한번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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