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병은 천천히, 철군은 신속히 하면서 군의 피로 해소

[초이스경제 장경순 칼럼] 살다보니 미국 대통령이 “항구에 배만 들어오면 만사해결”이라고 큰소리치다 도망가는 일도 다 구경한다. 항구에 진짜로 배가 들어오면 그것은 샤일록에 빌린 돈을 갚게 되는 안토니오의 신용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게 만약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배라면, 옛날 한국 영화에서 마담의 환심을 사려는 허장강의 허세일 뿐이다.

한국으로 이동한다던 미국 항공모함 전단이 실제로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최근의 지정학적 긴장 상태를 유발시킨 직접 원인이 느슨해진 면은 있지만, 장기적으로 최대 동맹국의 신뢰도가 흔들린 것은 큰 문제다.

그런데 미국이 이번에 구사한 ‘허장성세’ 전략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황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 미국 해군 항공모함 칼빈슨 호. /사진=뉴시스.


글 쓰는 직업인으로서 지금까지 여러 차례, 미국이 중국 춘추시대의 진(晉)나라와 흡사하다는 칼럼을 썼다. 기자의 지론이라고 할 정도인데, 미국이 정말로 그러한 면모를 보일 때마다 야구에서 적시타를 때린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심정이 든다.

진과 초(楚)가 냉전대결을 펼친 춘추시대 말기, 진나라 도공은 이 최대 강대국의 마지막 명군이다.

그의 치세동안 진초 대결의 최대 핵심은 중간지대 정(鄭)나라를 어느 쪽에 묶어 두느냐였다. 정이 편을 드는 쪽이 곧 천하의 패자가 되는 정세였다.

정이 초의 편에 서면, 진군이 출병해 정나라와 동맹 조약을 받아냈다. 이에 격분해서 초나라 군대가 출병하면 정은 다시 초와 동맹을 맺었다.

이런 일을 거듭해서 겪는 정나라로서는 그 때마다 국가 존립의 위기를 겪어야했다. 그동안 사례를 정나라 대신들이 되돌아보다가 중요한 점을 발견했다. 진나라 군대가 출병할 때는 느리게 진군하다 철군할 때는 신속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앞서 진나라는 기존의 출정군을 셋으로 나눠 하나의 군마다 함께 출병할 동맹국들을 배정했다.

기존의 병력을 3분의1로 나눴으니 초나라 대군과 마주치게 되면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편제를 바꾼 것은 진짜로 싸움을 하지는 않겠다는 의도였다. 잦은 출병에 따른 군의 피로도와 잦은 동맹군 소집에 따른 불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심은 싸울 생각이 없지만, 일단 진군이 출병했다는 사실만 천하에 널리 알림으로써 원하는 성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진나라 입장에서야, 불가피한 면이 있다고는 해도 안보를 위협받는 동맹국들이 이를 알게 된다면 불만이 커지고 맹주국으로 대우하던 진에 대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철기도 보급되지 않은 춘추시대고, 기마가 가능한 말도 널리 보급되기 전이다. 진나라의 출병원칙을 다른 나라에서 좀체 알기는 어려웠다. 정나라 신하들이 오랜 관찰 끝에 이를 간파한 것은 그만큼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항공모함이 지난 8일 현재 한국이 아닌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춘추시대 진나라의 출병원칙처럼 철저히 비밀로 유지됐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동북아시아의 강대국들인 중국이나 러시아의 정보당국이 이런 사실을 열흘 넘게 지나 워싱턴포스트를 보고 알았을 리가 없다. 미국 항공모함이 바로 오는 것이 아닌 줄은 알지만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전제로 자신들의 외교플레이를 펼쳤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어떻든 분명한 현실은 춘추시대 진나라처럼 미국 역시 전 세계의 잦은 출병의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앞장서 외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력부강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기 쉽다. 그런데 관건은 자력부강을 어떻게 하느냐다. 자원이나 국토의 한계로 강대국 같은 자력부강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외교의 섭리에 정통해 수백만 군대 이상의 효과를 내는 길도 가능하다.

지금의 한반도 정세는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까지 새로운 변수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라를 막론하고 외교를 국내정치의 보조수단으로 동원하는 궁색한 면모를 전혀 떨치지는 못한다. 그런데 강대국들은 외교의 이런 속성을 오히려 상대방을 통제할 때도 쓴다. 상대가 안고 있는 국내 문제 해결책을 던져줌으로써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다. 이런 기술을 북한도 쓰고 있는 정황이 엿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첫 해를 맞아 북한에 대해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다음의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던 강경한 입장을 밀어붙였다. 최소한 칼빈슨 호의 소재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럼에도 만약 북한이 지난 15일 열병식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력행사를 벌였다면,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무력동원을 정말로 하지 않으면 통치력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을 맞았을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트럼프에게 전하는 선물처럼 간주될 수도 있는 ‘자제’의 카드로 열병식이 진행됐다. 그 대신 북한은 이 행사에 치밀한 계획에 따른 물품들을 등장시켰다. 지켜보는 상대방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강요할만한 것들이다.

여기에 동원된 무기들이 어떤 것들은 구형이라고 떠드는 서방 논객들이 있는 모양인데, 군사무기 사이트나 찾아다니며 열광하는 ‘밀덕’들의 입방아는 대부분 남성들이 군경력을 갖고 있는 한국에서는 현실모르는 폐인들의 객담일 뿐이다.

북한이 동원한 무기들 중 일부가 장식품이라 해도, 이것들은 상당히 전술적, 외교적으로 배치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지난달 러시아가 북한의 노동력 수입을 법제화하면서 경제제재를 사전 봉쇄한 흐름과 맞물려 몇 가지 러시아 최강기술의 흔적을 보여주는 토폴 M 유형의 미사일 발사대가 주목되고 있다.

미국 중국 북한이 한 축인 동북아시아 정세가 아니라 러시아까지 포함된 4각축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현재 흐름이다.

동북아시아 시사전문가인 방세현 시사정책연구소장은 “푸틴 대통령이 몇 가지 카드만 살짝 보여줌으로써 이 지역의 시간을 정지시켰다”고 표현하고 있다.

진과 초, 양대축으로만 돌아가던 춘추시대가 7웅이 각축하는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듯한 모습이 동북아시아에서부터 엿보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의 막강한 군대가 전 세계 곳곳에서 이리저리 불려 다닐 일이 더 많아지게 된다. 내일 모레 온다던 항공모함이 함흥차사 되는 걸 당연히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소동에서 하나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미국의 항공모함이 실제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는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란 희망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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