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심상정 정의당 대통령후보는 최근 ‘2초 김고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혹독한 군사독재 체제에 무한의 용기로 맞섰던 노동투사를 가냘프고 어린 여배우로 비유할 만큼 한국사회가 변하기는 했다.

내가 취재현장에서 심 후보를 처음 봤을 때 인상과는 어느 정도 통하는 별명이다.

▲ 심상정 정의당 대통령 후보. /사진=뉴시스.

17대 국회 개원 직후인 2004년 여름, 본회의장 밖에서 남경필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현 경기도지사)과 뭔가를 의논하는 여성이 있었다. 남 의원을 전혀 윗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기세로 보아 다른 국회의원인 듯 했다. 용모가 약간 이지적인 면도 있어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여성 정치인인가보다 했다. 그때 국회에 처음 진출한 민주노동당 의원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지적’이란 표현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언뜻 본 첫인상 그대로 옮긴 것임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해 내 기사에서 심상정 의원을 TV앵커 출신의 다른 여성의원과 함께 ‘두 미녀 의원’이라고 언급했더니 매우 강렬한(?) 독자들의 반응을 기사 댓글로 볼 수 있었다.

거대정당들로 인해 국회 일정이 파행돼서 무료하게 상임위 회의실에서 장시간 대기하는 동안 아들의 학원 선생으로부터 “아이가 학원에 안왔다”는 전화를 받는 모습이 YTN 돌발영상에 노출된 적도 있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애가 학원을 갔는지 안 갔는지 어떻게 알겠어”라고 개탄하며 ‘워킹 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 아들이 자라서 이번에 재산공개를 했다. 그는 400만원의 예금을 공개했다.

이번 대통령후보 TV토론에서 한 시민은 심상정 후보에 대해 이렇게 촌평했다. “흥분만 안하시면 좋은데 흥분하면 바로 운동권 모드 돌입하심.”

진보정치인으로서 대중에 노출은 여러 번 됐지만, 전문 정치인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대부분 사람들이 심 후보를 노동과 진보운동에 매진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고, 본인도 거기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심 후보가 초선의원 때부터 선풍을 일으킨 분야는 노동이 아니다. 진보나 이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재정·경제 분야였다.

정무위원회를 희망했던 그는 거대정당들의 이해관계에 밀려 재정경제위원회(지금의 기획재정위원회)에 배치됐다. 재경부 장관·부총리를 지낸 사람 두 명에 미국 유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무수한 교수출신 의원, 대기업 회장 출신 의원 틈에 민주노동당 소속의 필마단기로 자리를 잡았다.

첫 번째 국정감사에서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파생상품 투자로 막대한 국고손실을 봤다고 실토한 건 저런 쟁쟁한 경력자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심상정 의원의 질문 때였다.

‘시장경제’가 ‘좌파 경제’의 반대말인 것처럼 오용되는 한국에서, 첨단 시장경제 분야까지 진보정당 정치인이 가장 돋보이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밖에도 수많은 국가기관장들이 앞뒤 숫자가 안 맞는 발언을 하다가 심의원의 호통과 지적에 혼비백산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심 후보가 초선의원이던 17대 국회 때는 단순히 노동이나 진보운동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 종합적인 국정 이해도를 과시할 수 있었다. 총선 전, ‘민주노동당의 원톱은 노회찬’이란 평가는 몇 달만에 ‘심상정-노회찬 투톱’으로 자리잡았다. 그 후, 19대 국회에서 본인의 원래 활약무대라고 할 수 있는 환경노동위원회에 배치되면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면모가 오히려 감춰지는 경향이 있었다.

심 후보 뿐만 아니라 진보 정치인들이 거시·재정 정책에 일침을 가하면 “이런 분야도 통달했구나”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노동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면 자세한 내용을 알기도 전에 “매번 하는 얘기”로 넘기는 경향이 존재한다. 심 후보가 국정의 모든 분야를 다 맡는 것을 찬성하지만 노동부 맡는 것만 반대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번 대통령선거 TV토론에서는 심상정 후보와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가 가장 돋보였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이런 평가가 약하게나마 지지율변동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당선 가능성’의 변화까지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그렇지만, 변화무쌍한 한국의 정치환경에서 앞으로 변화의 주체를 담당할 예고라는 장기적 전망도 분명히 존재한다.

앞선 글에서 유승민 후보에 대한 단상을 정리했다. (관련기사: 유승민, 12년전의 선택이 지금 가져오는 결과는?) 지금부터 12년 전, 그가 갑자기 비례대표를 사퇴하고 지금의 지역구 재보선에 ‘징발’됐다. 유력한 중앙정치인으로 성장한 오늘날 이것이 지역정서에 따른 제약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탄핵을 주도했으되, 그 사실을 굳이 내세우기 곤란한 듯한 모습이 나타나는 현상 등을 말하는 것이다.

유 후보가 지역의 제약조건을 안고 있다면, 심 후보는 진보정당의 제약을 받고 있다. 정의당이 통합진보당과 결별하면서 일부 완화되긴 했지만 정의당은 여전히 다른 주요정당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유리장벽에 쌓여있다.

진보 정치인들이 이 장벽을 극복하는 일을 다른 무엇보다 의미 깊은 정치과제로 여기고 있지만, 한편으로 지켜보는 국민들은 출중한 인재라면 그때그때 국정에 활용됐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 당사자 정치인이 큰 뜻보다는 당장의 현실적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변신을 하거나 , 한국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정치지형이 엄청난 변화를 해야만 실현될 수 있는 기대다. 정답을 찾기 힘든 얘기다.

단, 한국의 여론구조가 진보정당에 대해 두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은 까다로운 함정이다. 소수정파로 기탄없는 의정활동을 할 때는 모든 언론의 갈채가 쏟아진다. 그러나 진보정당이 집권을 기대해 볼 정도로 성장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극심한 진영논리의 표적이 된다.

지식인의 진수를 보여주는 멋진 기사를 썼던 똑같은 사람이 닳고 닳은 매카시즘적인 어휘를 불사하며 기사라기보다 험담이라고 할 만한 글을 뱉어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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