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요즘은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읽을 때 허전한 점이 하나 있다.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소감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과연 나하고 사람들 생각이 같은지, 내 판단이 안 설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라도 기사 아래 댓글 칸을 건너뛰지 못한다. 그만큼 독자들의 댓글은 이제 주요 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가 됐다.

하지만, 댓글은 어디까지나 댓글이다. 기사 본문은 기자들이 이름 석 자를 걸고 있는 직업공간이지만, 댓글은 쓰는 사람이 누군지도 알기 어렵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과 글의 파급력에서 수많은 독자들의 댓글은 기자 한 사람의 본문을 따라갈 수 없다. 이로 인해 때로는 댓글은 좌절된 정서를 그대로 나타내는 표현을 동원한다. 욕설 등 거친 표현이 섞인다는 얘기다.

그래도 댓글은 오늘날의 기자들에게 중요한 참고자료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격한 감정을 토로할 정도로 댓글을 다는 자체가 기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전제로 한다. 불건전한 상업 활동이 목적인 댓글은 물론 예외지만, 이런 댓글 또한 기사에 방문독자가 많아서 끼어든 것이니 해당 기자로서는 극히 일부 고무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기사를 쓴 사람에 대해 온갖 험담을 하더라도, 그것이 구체적인 위협행위가 아닌 이상 기자는 우선 자신의 기사가 독자의 관심을 받아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10년 넘게 글 쓴 사람 중에 “누가 저 기자 좀 어떻게 해 봐”라는 댓글 한 번 안 받아본 사람이 누가 있나.

기분이 상했다고 해서, 똑같은 표현으로 응수하는 기자는 ‘고객’인 독자에 대해 대단히 자세가 잘못된 것이다. 기사 본문이라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공간을 가진 사람으로서 불리한 댓글 공간에 위치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최근 한 언론이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를 ‘김정숙 씨’로 표현한 것을 두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작은’ 소동임을 강조한다.)

4년여 동안 대통령의 배우자가 없는 세월을 보내다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면은 있지만, 이 신문은 줄곧 앞선 대통령 부인들에 대해 이런 표기로 일관해 왔다.

신문과 관계자들의 설명을 상당 수 사람들은 이해하고 논쟁을 접었다. 하지만 인구 4000만 명이 넘는 나라에서 대중들의 논란은 그렇게 쉽게 종료되지 않는다.

일부는 해당 언론의 지난 기사에서 설명과 다른 표기 사례를 찾아내기도 했다.

이런 식의 갑론을박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흔히 보아왔던 것이다.

일부 기자는 논쟁을 자신들의 SNS로 가져가 좀 더 격의 없는 토론을 이어갔다. 여기서 소동이 발생했다. 한 기자가 ‘밑바닥 태도’를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 기자는 곧 사과를 했고 회사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소동이 더 추접해진 것은, 평소 이 언론과 대척점에 있어서 별로 사이도 좋아 보이지 않던 언론까지 가세하고 있는 점이다.

‘홍위병’이라는 상투적인 어휘까지 등장하고 있다. 가십성 기사도 아니고 사설을 그렇게 쓰고 있다.

댓글을 넘어서 어디 모여 시위를 벌인 것도 아닌데, 이런 호들갑이 나타나고 있다.

‘팩트’만 가지고 얘기한다면, 어떤 기사가 있었고 그 기사에 대해 독자들이 격렬히 항의하는 댓글을 달았다. 한 기자가 자신의 SNS에 선을 넘은 표현을 해서 독자들이 더욱 격분한 댓글을 달았다. 기자는 사과하면서 물러났지만, 독자들은 아직 분이 덜 풀린 것을 여전히 댓글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어떤 언론이 끼어들어 마치 중국의 홍위병들이 류사오치 부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던 장면을 연상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모습이다. 그렇게 일부러 추한 색을 덧씌우려고 해서 이 사회에 무슨 이익이 있을까.

그렇게 소란을 부추기려는 사람들에게는 이 한마디를 전한다. 

“이 나라 다수 대중은 귀하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고 귀하보다 훨씬 더 성숙한 사람들이니 제발 관심 좀 끄시오.”

넘쳐나는 생각이 있는데, 기물을 부순 것도 아니고 댓글도 쓰지 못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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