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제나라 경공(景公)은 강태공의 자손으로는 거의 마지막 명군이다.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를 다스렸다.

훌륭한 임금에는 대개 훌륭한 재상이 함께 하는 법. 경공에게는 안영이라는 당대의 명재상이 있었다.

진(晉)나라와 연(燕)나라의 침략위기를 맞아, 경공은 안영의 추천을 받은 전양저라는 장수를 기용했다. 전양저는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개선했다. 사마 벼슬을 받게 돼, 이후 사마 양저라는 호칭으로 유명해졌다.

문에는 안영, 무에는 사마 양저 두 사람이 보필하고 있느니 경공에게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어느 날 자신의 여인들과 조촐한 잔치를 열었지만, 그날따라 흥이 나지 않았다. 불현 듯 항상 나라를 위해 애를 쓰는 안영과 사마 양저 생각이 났다.

모처럼 안영과 술 한 잔 하겠다며 행차를 차려 그의 집으로 향했다. 임금이 행차한다는 말에 ‘황급히 관복을 입고 띠를 두르고 홀을 잡고’ 마중을 나온 안영은 “혹시 국내외 변란이 발생했습니까”라고 물었다. 경공이 이유를 설명하자 안영은 “나라에 관한 일과 다른 나라 제후에 관한 일이라면 신과 의논하소서. 술과 좋은 음식에 관한 일이라면 신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사양했다.

경공은 무안했지만, 말인즉 바른 말이라 발길을 돌려 사마 양저의 집으로 향했다.

사마 양저는 갑옷을 갖춰 입고 창을 들고 나가 임금을 영접했다. “다른 나라 제후가 침범해 왔습니까? 대신들 가운데 누가 반란을 일으켰습니까?”

똑같은 대답을 들은 경공은 발길을 돌려 자신의 비위를 잘 맞추는 다른 신하의 집에서 여흥을 풀고 환궁했다.

어떻든 임금을 하릴없이 돌려보낸 안영과 사마 양저는 다음날 함께 입궁해 경공에게 사죄했다. 사죄를 하면서도 “앞으로는 술을 위해 밤중에 신하의 집을 찾지 맙시오”라는 간언을 덧붙였다.

경공은 “그대들 두 사람이 없다면 과인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소. 하지만 모든 신하가 두 사람과 같다면 과인이 무료해서 어찌하겠소. 과인은 두 사람의 직무를 절대 방해하지 않을 테니 경들도 과인을 너무 간섭하지는 마시오”라며 일종의 ‘대타협’을 했다.

최근 임명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의 일화는 특히 사마 양저의 고사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그가 대위였을 때, 군 사령관이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면서 여군들을 보내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사령관 참모가 욕설까지 하는 지경이 되자, 피 대위가 여군들을 보내기는 했지만 당초 요구한 ‘예쁜 사복 차림’이 아니라 ‘전투복’ 차림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명령하신 병력을 보냈다”고 했다.

이 사실이 약간은 와전돼서 한동안 완전군장한 여군들을 보낸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여군들의 전투복 차림은 사마 양저의 갑옷 차림과 비슷한 효과를 냈던 모양이다. 이들은 곧바로 부대로 복귀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오랜 옛날의 고사와 똑같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 일로 인해 피 대위가 보직해임 됐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국가보훈처장으로 다시 중용됐으니, 국가 전체적으로는 제나라 경공과 같은 밝은 시스템이 작동한 셈이다.

국가유공자들이란, 온갖 정치 대립을 초월해 모든 국민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다. 미국을 예로 든다면, 베트남 전쟁에 끼어든 것은 오늘날 죄악으로 여기는 미국인이 더 많은 형편이지만, 베트남 참전 용사들에 대해서는 절대다수가 존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포로생활을 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2007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도 했었다.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이러한 유공자들을 보살피는 기관이다. 정쟁의 소란을 초월한 일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한동안 보훈처가 불필요한 논란을 자처해, 정치 대립을 초월하기는커녕 오히려 대립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경향이 있었다.

정부 정책이란 찬반을 함께 부르는 법이지만, 국가보훈처의 일만큼은 이제 절대다수 국민의 존경을 잃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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