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강한 정당들... 1988년 1노3김의 '4당 체제' 비슷한 모습도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이른바 ‘1노3김’의 1988년 4당 체제는 2년의 짧은 기간으로 끝났지만, 한국 정치사에는 매우 이례적인 실험기간이었다. 양극단의 극한대결만이 우월하던 정치판에서 모처럼 협상과 합의가 중시되던 때다. 한국 의회정치의 고질병인 날치기나 의장석 점거가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었다.

1987년의 민주화 운동과 6공화국이 출범한 후 다음해인 1988년 4월 총선에서는 사상 최초의‘여소야대’ 정국이 탄생했다. 집권 민주정의당(민정당)이 125석으로 과반에 미달했고 평화민주당(평민당) 70석, 통일민주당(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공화당) 35석으로 그 어느 당도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게 됐다.

주요 4당은 모두 확실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단일체제를 가졌다. 그래서 민정당 총재를 겸한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의 ‘1노3김’ 체제로도 불렸다.

지금은 원내대표로 명칭이 바뀐 원내총무의 역할이 돋보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당 총재들의 위상이 강해 원내총무들이 협상장에서 큰 줄기를 바꾼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긴 했다. 하지만 4당간 끊임없는 협상과정에서 당의 색채를 유권자들에게 분명히 전달하는 역할을 원내총무들이 수행했다.

의석 배치로 언뜻 보기에는 군사통치 세력의 후예들인 민정당과 공화당만의 연합으로 과반수를 넘기니 전두환의 5공통치가 연장됐을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공화당을 이끈 노정객 김종필 총재의 정치 감각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6월 항쟁을 통해 5공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시대적 민주화 요구가 지배하던 시기다. 민정당의 연정 파트너로 덜컥 뛰어드는 시대역행을 김 총재는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다른 두 김 씨와 함께 3야당 연합을 결성했다.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 임명 동의안이 부결된 것은 3당 연합이 위력을 보여준 첫 번째 사례다.

그런데 3당이 부결을 선택한 방식이 저마다 달랐다. 평민-민주당 의원들은 백지투표를 통한 원천적 기권, 공화당 의원들은 개별 투표는 하되 대부분은 역시 무효투표에 동참했고 일부가 반대 표결했다.

이것은 공화당이 다른 두 야당과 공조는 하되, 사안에 따라서는 여당인 민정당에도 협력할 수 있음을 예고했다. 실제로 일부 안건이 민정당과 공화당만의 찬성으로 통과되기도 했다.

공화당의 행보는 제3당이자 제2야당인 민주당의 행보에도 상당한 변수가 됐다.

진보성향에서 상대적으로 평민당보다는 안정성을 중시한 민주당은 야당의 원천적인 투표 거부를 통해 법안이 부결되는 것에 대해 정치적 부담을 가졌다.

어떤 안건은 공화당이 민정당에 공조하는 것을 확인하자, 민주당이 ‘부담 없이’ 평민당의 기권 투표에 동참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현실적으로 법안이 통과될 것이 확실하자, 당의 개혁성을 과시하는 것에 집중했다는 설명이다.

4당의 성향은 농가부채 해결책에서 대표적으로 구분이 됐다. 민정당 난색 – 평민당 탕감 – 민주당 경감으로 엇갈리는 가운데 공화당은 여타 정당들의 조정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소야대로 법안이 부결되는 사례에 한국사회가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것이 이 체제의 조기 퇴장을 초래했다. 1990년이 시작되자마자 민정당-민주당-공화당은 3당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의석수로는 단독 개헌도 가능한 거대정당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노태우 정부의 정치 활력은 소수 여당 때보다도 감퇴했다. 자잘한 법안을 그때그때 통과시킨 건 많았어도 국민적 합의를 등에 업고 추진할 수 있는 일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숫자의 횡포를 비난하는 평민당을 설득하기에 앞서 민자당 내 의견조정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정치가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4당 체제 실험을 했다면, 타협을 통한 정치가 좀 더 깊게 뿌리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장면이다.
 

▲ 국회 정무위원회의 이낙연 국무총리 임명동의에 관한 인사청문특별위원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의논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준 동의안이 31일 국회에서 통과된 과정은 1988년 4당 체제와 일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

처리 결과를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지난해 국정농단 사태 이후 오랜 국정 공백을 해소해야 된다는 5당의 고심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됐다는 것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찬성입장은 두 말할 필요가 없고, 국민의당과 정의당 의원들도 찬성 표결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표결 전 퇴장을 통해 ‘표 단속’을 통한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바른정당은 표결에는 응하되, 부결하기로 결정했다. 소속 의원 가운데 한 명의 이탈도 없었음이 이날 표결 결과가 보여주고 있다.

원천 백지투표와 비슷한 행태가 섞인 것이 일부 개탄스럽기도 하지만, 대부분 정당들이 당의 정체성과 관련해 나름의 행보를 선택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지금의 5당 체제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면, 국민들의 보다 더 다양한 요구를 정치권이 반영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남기고 있다. 정당간 의견이 크게 다르다면, 상대당의 현실적 비중만큼 의견을 반영해 절충안을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어차피 지금의 국회는 한 쪽이 숫자로 다른 쪽을 무리하게 압도할 수도 없다.

이번의 5당 체제는 1988년의 4당 체제와 달리, 빠른 해답에 집착하는 조급증을 버리고 의논과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전통을 세워줄 것을 기원한다. 상대의 현실적 비중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빨리 해결책을 찾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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