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장관급 이상의 인사청문회는 인품과 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다. 현실은 능력보다 인품검증에 집중되고 있다.

주요 장관들이 병역미필로 채워지던 시기에는 일부러 아주 심하게 자질 떨어지는 인사를 섞어 넣어서 나머지 자질미달들이 통과되게 만들었다는 세간의 불평도 나왔었다.

야당은 인사청문회를 정국 반전의 계기로 삼으려고 부심하게 마련이다. 다만 현재는 새 정부의 집권 초기여서 지금의 야당이 여당시절 어떤 장관들을 내세웠는지 국민들이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점이다.

일부 인사에 대한 야당의 반발을 민주당이 10년 전 야당 되자마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로 돌아섰던 것과 비슷하게 보고 있는 국민들이 상당수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정말 이 나라에는 먼지가 안날 분이 계셨다. 아주 먼지가 없을 수는 없지만, 사람의 눈으로 따질만한 먼지가 정말 없었던 분이다. 말투에서 독자들이 눈치를 채겠지만, 아쉽게도 하늘은 너무나 일찍 이 분을 데려가셨다.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의 6월17일 밤, 타계했다.
 

▲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의 재임 중 모습.


해마다 때가 되면 솔뫼 전철환 총재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지난번 쓴 글을 다시 쓰는 일이지만 너무나 큰 의미가 있다. 한국 금융시장의 지독한 건망증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대한 분이 있었던가를 완전히 잊게 만들고 있어서다.

그가 몸 담았던 한국은행은 자신들에게 얼마나 위대한 기관장이 있었는지 정말로 아무 기억이 없는 모습이다. 10주기 때를 비롯해 그 후 많은 세월동안 전철환 총재를 기념할 만한 아무런 행동을 본 기억이 없다.

한은 총재가 임기를 채우는 자체가 ‘기적’이라던 현실은 1998~2002년 전철환 총재를 통해 완전히 달라졌다. 그가 4년을 채우고 떠난 시점부터, 이제 그 어느 대통령도 한은 총재를 함부로 해임하면 안되는 것으로 위상이 달라졌다.

이런 위상 변화가 오히려 ‘독약’이 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소신은 저만치 내팽개치고 오로지 정권의 눈치나 보면서 자동문처럼 금리를 내려대는 총재들까지 ‘임기 보장’의 혜택을 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전철환 총재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다. 둘 다 전 총재가 한은 총재 재임 중 결혼했다.

결혼식 때 한은을 비롯해 온갖 금융관련 기관의 하객들이 가득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이 분명 있겠지만, 전 총재 인품에는 씨알도 안 먹힐 얘기였다. 둘째 아들인 전종익 서울대 교수가 기억하는 결혼식은 “정말 집안 어른들이 많이 오신” 자리였다.

금융관련 기관은커녕, 한국은행 사람들조차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두 번 모두 그랬다. 전 총재가 철저하게 한은 내에서 비밀에 붙인 때문이다.

속물근성에 젖은 인간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그건 비서실 직원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조롱할지도 모른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그나마 수행비서는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어떻든 친한 사람에게는 알려줘서 총재의 눈도장을 받을 수 있게 했어야 한다고 믿을 것이다. 한국의 적폐 청산에는 이런 속물근성을 완전히 말려버리는 것도 포함돼야 한다.

결혼식을 통해 사돈댁에게 무수한 하객을 보여줌으로써 “나 이런 사람이요”라고 과시하려는 것을 ‘인지상정’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많지만, 전철환 총재에게는 오로지 공적인 자리의 사적인 남용일 뿐이었다.

총재가 되자마자 그는 두 아들에게 “오늘 이후 내가 퇴임하는 날까지 주식은 단 한주도 사지도 말고 팔지도 말라”고 엄하게 명했다.

그로부터 14년 후, 전 총재가 타계한 지는 8년 후, 국회 국정감사에서 금융통화위원들의 채권보유가 말썽을 일으켰다.

전철환 총재 생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다. 한은이 아니라 별도 증권당국이 존재하는 주식시장의 단 한주 매매도 멀리하던 총재가 퇴임한지 10년 만에, 중앙은행의 최고결정권들이 스스로 직접 관리하는 채권시장에서 뒹굴었다는 얘기다. 당시의 국정감사를 취재하는 내내 전 총재의 빈자리를 실감하며 개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 가닥 의혹의 여지가 있다면, 멀리멀리 우회해 가는 일을 절대 억울하게 여기지 않던 전철환 총재의 생애다. 경제정책 기관장으로서, 그에게 의혹의 소지라면, 행여 평소 같지 않은 이익이 생기는 경우였다. 다시 말해 프라이드를 손수 운전하던 충남대 교수시절에 볼 수 없었던 이익이라면, 그것은 곧 현재의 직위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두 번 돌이켜 볼 필요도 없이 배격했다.

그가 총재에 임명됐을 때, 충남대는 교수직은 계속 유지해 줄 것을 희망했다. 한국은행 총재가 본교 교수진에 있는 사실이 학교에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전철환 총재의 몸가짐에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총재 취임과 함께 충남대 교수에서도 퇴직했다.

만약 교수직을 계속 유지했다면, 2002년 퇴임 후 교수 정년퇴직까지 1년은 더 강단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전철환 총재가 이 나라에 전례 없는 고위공직자의 결백한 처신과 시장 관리능력을 보여주면서 한은 총재는 이제 정권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2월 그가 금리를 올리면서 청와대와 당시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으로부터 상당한 유감을 샀지만, 중앙은행 총재의 거취와는 전혀 별개였다.

오히려 정권은 그가 한은 총재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를 아쉬워해 다시 공적자금관리위원장으로 기용했다.

중앙은행 총재의 경험까지 더 해, 젊은 시절부터 헌신해온 신용협동조합 연구에 매진하던 그는 어느 날 허리에 불편을 느꼈다. 노화에 따른 것으로 여기고 병원 수술날짜를 잡은 그는 수술 날을 피해 이날저날 점심 약속도 잡아서 이를 수첩에 기록했다.

간단한 듯 보였던 수술은 검사과정에서 심장수술까지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여전히 서재의 책상에는 읽고 있던 책들과 약속 날을 잡은 수첩이 열려있었다.

수술 경과는 처음에 좋은 듯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의료진이 걱정했던 증상들이 나타났다.

2004년 6월17일 밤, 전철환 총재는 회복하지 못하고 타계했다. 향년 66세. 젊은 시절, 고향에서는 기운이 좋은 그가 여름방학에 올 때까지 큰일을 미뤄두고 있었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아직도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스스로 크게 쓰이기를 바랐으면서도, 성장과정에서 푼돈의 이익을 멀리하지 못하고 잡음을 자초하는 무수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더욱 빈자리를 절감하게 되는 고 전철환 총재의 13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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