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전쟁'에서 압승을 거둔 전철환 총재... 힘의 원천은 시장의 신뢰였다

▲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지금부터 16년 전인 2001년 3월21일.

서울 시내에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두 경제정책 수장의 호텔 전쟁이 벌어졌다.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와 진념 경제부총리였다. 진 부총리는 한강 북쪽 하얏트 호텔에, 전 총재는 한강 남쪽 리츠칼튼 호텔에 ‘진’을 쳤다.

사실 전철환 총재는 진념 부총리의 전주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선배로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였다. 그해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이 개관할 때 축사를 하기 위해 참석한 진 부총리는 “매번 한국은행 올 때마다 저를 비판하는 분들의 시위가 있었는데, 우리 선배이신 전철환 총재 덕택으로 오늘은 그런 ‘환영(?)’ 없이 오게 됐다”며 친근함을 과시했다.

이렇듯 화목한 두 사람이지만, 이날만큼은 금융시장을 한가운데 놓고 “당신들 누구 말을 들을 것이냐”며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진 부총리는 “성장률이 4% 미만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지금이야 4% 성장이 대단히 높게 보이지만, 1999년 성장률은 11.3%, 2000년은 8.9%였다. 그랬던 경제가 2001년 4%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은 무서운 경고였다. 채권시장에서 금리가 바닥으로 뚝 떨어질 만한 얘기였다.

반면, 전철환 총재는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4% 이내로 억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의 물가안정 목표는 당시 2.5%를 기준으로 위아래 1%포인트의 범위를 갖고 있었다. 요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에서 사용하는 대칭적 물가안정목표(Symmetric Inflation Goal)와 같다.

전 총재의 얘기는 한국은행이 그해 물가안정목표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임을 밝힌 것이다.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 목표를 지키는데 어려움이 발생하면 대응수단은 금리를 올리는 것이 된다. 당시 한국은행의 정책수단이던 콜금리를 인상하게 되면 시장금리가 뒤따라 오르게 된다. 전철환 총재는 금리가 치솟을만한 얘기를 했던 것이다.
 

▲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의 재임 중 모습.


채권시장의 투자자들은 이날 극심한 갈등과 혼란에 빠지게 됐다. 진 부총리 말 대로면 금리가 떨어질 것을 예상해 채권을 사야하고, 전 총재 말 대로면 금리가 올라갈 것을 예상해 채권을 팔아야 한다.

두 정책수장이 채권투자자들의 팔을 하나씩 붙잡고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너무나 싱겁고 일방적으로 끝이 났다.

3월20일 5.63%였던 금리는 두 사람의 발언 당일인 21일 5.71%로 끝났다. 0.08%포인트의 금리상승으로 전철환 총재의 손을 들어줬다. 금융시장은 두 사람에 대한 우열판단이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긴 듯 다음날에는 지표금리를 5.85%로 더욱 급격히 올렸다. 이틀 동안 무려 0.22%포인트의 금리가 치솟았다.

한 쪽 팔을 경제부총리가 당기든 말든, 금융시장은 오로지 한국은행 총재의 얘기에만 주목해 우루루 채권을 투매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01년 한강을 사이에 둔 한은 총재와 경제부총리의 호텔 전쟁이다.

한국은행이 기획재정부에 질질 끌려 다니는 수세인 것으로만 아는 사람들은 믿기 어려울 수도 있는 16년 전의 사례다.

당시 금융시장이 이토록 전철환 총재의 발언을 절대 신뢰했던 것은 특히 오늘날의 한국은행 사람들이 유심히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한은의 힘이란, 이제 금융감독원이 가져가 버린 옛날 은감원의 감독권이 아니라 바로 이런 시장의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금융시장에 일관된 신호를 보내기 위한 노력을 한순간도 저버린 적이 없었던 전철환 총재의 ‘시장친화’ 정책이 만들어낸 신뢰였다.

한국은행은 한국의 화폐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금융시장을 관리하는 곳이다. 철저히 시장을 관리함으로써 한은이 발행하는 원화의 가치를 보호하는 곳이다. 그것이 곧 중앙은행이 경제를 지키는 방식이다.

전철환 총재는 이런 소임에 부합하는 일이라면 국회의원들 앞에서도 한 치도 물러서는 적이 없었지만, 전혀 금융시장과 무관한 일이라면 옆에서 아무리 누가 부추겨도 한마디 입을 열지 않았다.

간혹 한은 총재로 부임하는 사람 가운데는 ‘장관급’ 자리에 대한 미련이 앞선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낳는 이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쓸데없이 이 세상 오만가지 일을 전부 다 간섭하고 다니는 특징을 보였다. 화폐 액면 단위변경부터 시작해 일개 구청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순환출자와 같은 뜨거운 논란에 뛰어드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은행 총재의 위치를 갖고 있으니 언론은 그 때마다 대서특필해서 그 어떤 장관들보다 한은 총재가 신문지면을 자주 장식했다.

정신이 시장이 아닌 다른 장관들의 영역에 팔려있으니, 가끔은 시장에 엉뚱한 신호가 전달돼 극심한 혼란도 자초했다. 보다 못한 국회의원이 한은 총재에게 “본인의 발언을 관리해주는 컨설팅을 받아보라”고 조언할 지경이었다.

시장의 혼란이란 것은 단순히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채권시장에서 금리가 10여 년 전 같으면 하루 0.1%포인트, 요즘 기준으로는 0.01~0.02%포인트 이상 출렁거리는 날은 투자자들의 1년 농사를 단숨에 날려버릴 수도 있다.

이런 급등락이 경제상황의 급변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라면 투자자들은 불가항력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경제당국자들의 일관되지 못한 신호로 시장 혼란이 초래돼 회복 불가능한 손실이 발생하면, 그날의 금융시장은 없느니만 못한 금융당국을 절대 용납 못하게 된다.

전철환 총재가 퇴임한지 15년, 그리고 그가 타계한지 13년이 지났어도 금융시장이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모두 여기에 있다.

최고의 한국은행 총재는 누구인가. 그에 대한 정답은 정부가 내리는 것도 아니고 정치인들이 내리는 것도 아니다. 한국은행 직원들이 내리는 것도 아니다.

누가 최고의 한국은행 총재인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바로 금융시장의 사람들이다.

중앙은행 총재는 절대로 서별관회의나 불려 다니는 또 하나의 장관자리가 아니다. 내놓는 발언 하나하나가 모두 경제지표가 돼야하는 그런 자리다.

정부나 정치권, 그리고 한국은행 그 누구도 지난 17일로 13주기를 맞은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에 무관심할지 몰라도, 금융시장만큼은 절대로 그를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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