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51] 경제 위기에 빠져 있던 그리스에 지난 2015년 좌파 정부가 집권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의 그리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 등 채권단과 채무불이행 갈등을 한껏 고조시켰다.

유로단일통화를 볼모로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그리스는 앞서 1997년 외환위기 극복의 모범생이라고 자부(?)하는 한국과 너무나 달랐다. ‘좌파’나 ‘복지 과잉’에 특히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한국의 여론에서는 ‘그리스 필망론’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최근의 그리스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국제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는 지난 23일 그리스의 신용등급을 Caa3에서 Caa2로 한 단계 상향 조정했다.

그동안 그리스는 채권단 요구에 복종하기는커녕 EU와 IMF의 고위 관계자들에게 ‘제3세계 자주운동’을 하는 듯한 비난도 불사했다. 채권단과 해마다 지급불이행 위기를 겪고 있지만, 연례행사처럼 넘기는 일이 지속되고 있다.

그리스 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2015년 여름 관건은 과도한 연금지급이었다. 명백히 상식에 어긋난 과도한 연금지급이지만, 집권 시리자 정부는 상당수 그리스 국민들의 생계가 걸린 문제임을 중시했다. 채권단과의 합의안을 부결시키는 국민투표를 통해 치프라스 총리는 채권단과의 협상에서 힘을 얻었고, 곧 이어 조기총선을 승리함으로써 당내 극좌파의 영향력을 차단했다.

속도는 한국의 위기극복보다 훨씬 더딘 것으로 보이지만, 어떻든 그리스는 국민의 생계파탄을 회피하는 댓가로 느린 회복을 선택하고 있다.

한국과 비교한다면, 그리스는 단일통화인 유로존에 편입돼 있어 자국통화 절하를 통한 쉬운 해결책을 쓰지 못한다. 반면, 단일통화 유지라는 정치적 명분은 그리스가 채권단에 대해 ‘벼랑 끝 전술’을 쓸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왼쪽)와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사진=그리스 총리실 홈페이지.


그리스의 위기대응 과정을 살펴보면, 과연 한국의 1997년 ‘IMF 위기’ 극복의 방식이 선택의 여지없는 것이었나라는 의문을 다시 제기한다.

국가경제의 지표는 위기 탈출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고금리로 인해 무수한 국민이 회생 불능으로 추락한 것이 과연 바람직한 해결이었냐는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당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IMF와의 재협상’을 언급하자, 외국 채권단이 나서기도 전에 국내 언론이 집중적으로 김 후보를 성토했다. 이런 경색된 분위기로 인해 한국은 IMF의 고금리 처방을 그대로 수용했다. 이것이 수많은 기업을 파산시키고 국민들을 노숙자로 내모는 최대 원인이 됐다. 하지만, 차후에 IMF 고위관계자도 고금리를 지나치게 오래 유지한 것이 실책이었다고 지적했다.

금융연구원의 거시경제전문가인 박종규 박사는 당시 한국이 지나치게 IMF 요구에 충실한 바람에 불필요하게 많은 파산과 실업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국이 정책독자성을 유지했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는 다른 나라의 마이너스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다고 그는 비교했다.

박 박사는 24일자 금융브리프 금융포커스에서 “올해는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를 겪은 지 20년이 되는 해로 당시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IMF의 아시아태평양국장이었던 휴버트 나이스는 최근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 고금리가 필요하긴 했지만, 금리 인하시점이 다소 늦었다”고 밝혔다.

박종규 박사는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6.7% 후퇴하고, 설비투자는 39.3% 급감하는 가운데 1999년 2월 실업자가 180만명을 초과해 실업률이 8.8%에 이르는 한국전쟁 이후 최악 침체를 겪은 큰 원인은 통화긴축, 즉 고금리정책에 있었다고 지적했다.

고금리를 과도하게 오래 유지한 바람에 연쇄적 흑자도산과 대량 실업, 소비와 투자의 극심한 침체를 초래했다.

박 박사는 당시 재정은 위기 극복에 충분할 만큼의 적자재정은 아니었지만, 긴축재정도 아니었다고 밝혔다.

IMF는 한국에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콜금리와 본원통화량, 외환보유액의 세 가지 조건을 매일 충족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들 조건은 1998년 1분기 중 외환보유액은 초과달성하고 콜금리는 목표 달성했으나 본원통화는 목표미달 상태가 됐다. 이에 대해 박 박사는 이들 성과지표 간에 일관성이 부족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IMF 기준대로 본원통화공급을 늘리면 내수가 살면서 수입이 늘어 외환보유액 실적을 맞추기 어려워지고 콜금리는 낮아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콜금리 목표가 너무 높아, 이를 맞추기 위해 본원통화공급을 억제해야 했기 때문에 IMF의 요구 수준을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한국은 미국 연방준비(Fed)와의 통화스왑 등을 통해 외환수급에서 자유로워졌고 1997년 위기 때와 반대로, 금리를 인하하고 적극적 적자예산 편성으로 위기에 대응했다고 박 박사는 밝혔다.

그 결과, 다른 나라의 마이너스 성장과 달리 한국은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고 1979년 2차 오일쇼크, 1998년 외환위기, 2003년 카드사태와 비교하면 성장률 하락에 비해 실업률 상승폭이 크지 않았다고 그는 분석했다.

박종규 박사는 적정한 경상수지 흑자로 외환보유액을 충분히 유지하는 가운데 필요시 통화스왑이 가능하도록 준비해 둠으로써 독자 정책성을 확보하는 것이 ‘IMF 외환위기’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앞서 지난 2016년 1월, Fed가 당시 0.25%이던 금리를 궁극적으로 3% 안팎의 수준으로 높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Fed의 핵심 인사인 존 윌리엄스 샌프란시스코 Fed 총재는 최근 서울을 방문해 금리를 3%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까지 올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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