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칼럼] 한국과 미국의 정상회담이 끝났다. 무난히 마쳤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어느 역대 미국 대통령보다 ‘대통령일언중천금’의 원칙이 의심스러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장 내일 또 무슨 얘기를 꺼낼지는 모르는 일이다. 무엇보다 이번 정상회담 때 그의 정신은 온통 다른데 팔려있었던 정황이 농후하다.

그의 핵심정책인 ‘트럼프 케어’의 미국 의회 상원 통과 여부가 불확실해지자 극도로 예민해진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여성 언론인에 대한 극단적 모욕을 했다. 이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소식은 미국 언론의 헤드라인에서 더욱 찾기 힘들었다.

상대방의 집안 사정이 어수선한 가운데 이뤄진 문 대통령의 미국방문이지만, 상당히 의미 깊은 일들도 있었다. 미국인들에게 한국인들은 함께 싸운 기억을 절대 잊지 않는 사람들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흔들릴 수 없는 양국 국민 간 신뢰의 근본이다.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도 ‘함께 싸운 의리’를 잊지 않는 사람들임을 계속 입증해왔다. 의리를 지키는 댓가로 고통을 겪는 일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 인조가 겪은 ‘삼전도의 굴욕’이다.
 

▲ 인조가 병자호란 때 농성을 마치고 항복을 위해 출성했던 남한산성 서문. /사진=뉴시스.


요즘은 인조가 몰아낸 임금 광해군을 호평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자신이 존경하는 전 대통령 한 분을 광해군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건 상당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맹활약한 왕자이고, 전후 재건 시기를 경제 사회적으로 관리한 면은 있지만 그의 정권은 치명적 과오를 안고 있다. 이른바 ‘삼창’으로 불리는 광해군조 강경파의 폭정은 영창대군 살해와 같은 전대미문의 범죄를 저질렀다. 앞서 임해군을 처형한 것은 역모에 따른 사사라는 법집행의 형식은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영창대군은 이런 형식조차 번거롭게 여긴 정권 강경파들에 의해 사고를 가장한 증살(蒸殺)로 사망했다. 아홉 살 어린아이가 유배된 방의 아궁이에 불을 마구 때워 견디다 못한 영창대군은 바닥을 피해 벽을 기어오르다 손톱이 빠질 정도였다고 한다. 끝내 뜨거운 증기로 인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영창대군을 죽이고도 광해군의 정권은 9년을 지탱했다. 만약 이 기간에라도 이제 극단적 정치를 그만두고 여론 주도층과 소통하는 정치를 했다면 인조반정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 폭정세력의 특징은 절대 그 자리에서 멈추거나 자제하지 않는다. 4년 후에는 유교이념의 국가에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인목대비 폐모를 밀어붙였다. 5년 후 반정을 성공시키는 불만세력이 형성되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토양을 만들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정권이 쫓겨나면, 그 이전까지 해왔던 모든 정책이 패륜정책으로 매도당한다. 그 가운데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 중립외교도 포함됐다. 폭정세력은 여론주도층을 무조건 잠재울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대부분 정책이 희박한 민심 기반을 갖게 된다.

인목대비는 1623년 인조반정을 승인하는 교지 마지막 부분에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확인해줬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백여 년이 지났으니...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며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고 꾸짖었다.

대비는 “기미년(1619년)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며 광해군의 밀지를 기정사실화 했다. 대비는 이어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라며 “중국 조정에 죄를 지었다”고 개탄했다.

광해군의 죄목 가운데 마지막으로 언급된 중립외교는 반정세력들이 당시의 식자층들에게 명분으로 내세우기에는 적합한 주제였다. 이로 인해 새로 들어선 인조와 서인정권이 스스로 ‘친명’의 족쇄를 차는 계기도 됐다.

그렇다고 이들이 후금의 강인한 군사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다.

특히 가장 많은 정보를 접하는 인조의 근심은 그칠 날이 없었다. 가끔 조회를 열어 대신들에게 “어떻게 오랑캐를 막을 것이냐”고 물어보면 대신들은 “어찌 오랑캐들과 화친이 있겠습니까”라는 동문서답만 하니 왕의 속만 타들어갈 뿐이었다.

병자호란 직전 까지도 정묘호란 때의 협약이 남아있어서 변경에서는 말 거래와 같은 접촉이 계속 이뤄졌다. 청나라 장수 마부대는 조선 장수 임경업에게 “한(汗.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이 여러 왕자들과 매번 이르기를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朝鮮兒女之國)인데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하고 항상 웃는다”며 협박 겸 조롱을 했다.

그래도 인조는 겁은 나지만, 중립외교를 부활시키지 못했다. 왕은 전란의 참상을 예상한 듯 하지만 조선의 여론을 결정하는 사대부 사회를 바꿀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이씨가 근세 보기 드물게 500년의 왕실을 지킨 것은 역설적으로 법치의 제약을 받는 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치는 조선의 주도층인 사대부 사회의 신념을 체계화한 것이다.

식자층이 ‘함께 싸웠던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데 왕이 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명분이기도 하다. 왕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무수한 비난 상소 속에서 최명길과 같은 주화파를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주화파 덕택에 삼전도의 현장에서 그나마 최악의 비참함을 면하고 최소한의 체면은 지킬 수 있었다. (관련기사: 삼전도에서 인조가 피를 흘렸다고?)

인조는 성군이냐, 혼군이냐를 떠나 그의 정권은 철저히 조선 여론주도층, 즉 사대부들의 뜻에 최대한 복종하는 성격을 가졌다. 이를 거부했던 광해군 정권은 15년 만에 몰려났고, 순종한 인조 정권은 전쟁에서 참패하고도 26년간 지속돼 인조의 승하와 함께 마감됐다.

고지식하게 ‘함께 싸운 의리’에 집착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오히려 전란의 시기가 끝난 뒤엔 평화를 얻는 이유가 됐다. 청나라 또한 만주족 시절과 달리, 몽골 티벳 그리고 러시아와 끝도 없는 전선을 갖게 된 마당에 ‘옛 의리’를 중시하는 조선에 군사력을 집중할 여유도 필요도 없었다. 

임진왜란과 함께 일제침략기 임시정부와 중국정부의 공동 항일 전선, 한국 전쟁 때 미국 등 연합군의 참전은 모두 한국 역사의 ‘함께 싸운 경험’들이다.

이런 기억을 잊지 않고 있음은 많이 보여줄수록 상대국가 국민들과의 신뢰를 두텁게 하는 일이다. 단, 그 나라가 건재하고 있을 때란 전제조건 있다. 인조에게 부족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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