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는 이른바 ‘스카이’라는 3대학교에는 가지 못했다. 동아리 활동을 교내가 아니라 교외에서 했더니 나와 같은 학년에는 이들 학교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동아리는 지방 주요도시에도 별도 클럽이 있어서 해마다 여름이면 전국적인 캠프를 가졌다.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등 지방의 국립대 학생들을 여럿 만났는데, 언론에서 한 단어로 표기하는 ‘지방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서울의 학생들이라고 특별히 식견을 더욱 내세울 것도 없었고, 자부심은 오히려 지방의 동아리 사람들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세속적인 사고방식이 발동을 해서, 캠프가 끝나고 돌아온 후 당시의 ‘학력고사(지금의 수능에 해당한다) 커트라인’을 살펴봤다. 놀랍게도 ‘지방대’의 주요학과는 각 학과별 전국서열에서 4~5위 이내에 드는 곳이 수두룩했다.

지금의 대입 점수 판도는 그때와 엄청나게 다르다고 한다. 예전의 “전국 최고학과가 아니면 내 동네에서 대학 다니겠다”던 세태가 “일단은 서울로 가고 보자”로 바뀌어 지방대학교들은 신입생을 받는데도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상당부분, 수도권 집중이라고 표현되는 국토의 불균형 개발에 있다. 대학 스스로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는 얘기다. 원인이 그렇다면 해결책을 대학 자체적으로만 찾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예전의 자부심 드높던 지방 국립대 선배들이 지금의 현실을 예상도 못했던 것처럼, 지금의 기세가 꺾인 모습도 언제든 전혀 다른 상황으로 바뀔 수 있다.

특히 대학의 숫자화된 서열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대학을 들어갈 때는 중위권 대학이란 평가를 받는 곳에 들어갔는데, 중년에 접어들었을 때는 모교의 위상이 부쩍 높아져서 후배들 덕택에 명문대 출신으로 대접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대학의 지성사(知性史)다. 국가와 사회의 역사에서 커다란 사건의 한복판에 그 대학 이름이 기록된 것은 돈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지성적 가치다.

학원에서 한 달이면 가르칠 것을 대학에서 한 학기 또는 1년이나 걸려가며 가르치는 것은 대학의 교육이란, 인간과 양심에 대한 고뇌를 전제로 하면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되기 전, 명문대학일수록 데모를 열심히 한 것은 단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1960년대 서구사회를 휩쓴 반전학생운동도 그 나라 최고수준의 대학들이 앞장을 섰다.

한국의 지방국립대들은 이런 면에서도 서울 학교들에 뒤지지 않는 역사적 자산을 갖고 있다. 1979년부터 향후 10여년의 대격변을 앞장서서 불러들인 것은 모두 지방 국립대생들이다.

유신독재 정권 붕괴의 계기가 된 1979년 부산마산 항쟁은 10월 어느 날, 부산대 교정에서 유인물을 살포하던 한 학생이 그 자리에서 검거되면서 시작됐다. 다음 해, 새로 등장한 신군부 정권의 살인진압에 민중들이 피로써 가장 처음 맞선 5.18 현장은 전남대 교문 앞이다.
 

▲ 5공 신군부 세력이 1980년 5.17 쿠데타를 벌이기 직전의 전남대 시위 모습. 이 때까지는 계엄군이 아니라 경찰이 진압에 나섰다. /사진=뉴시스.


대학이 이러한 역사를 갖고 있으면 특히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놀라운 학문적 성과로도 이어진다.

독일의 1930년대 프랑크푸르트에 모인 학자들은 이미 상당한 명성을 가진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이들이 나치정권의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독일이 패전하고 분단된 서독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시당국이 나서서 전 세계에 흩어진 예전의 학자들을 다시 초청했다. 이들이 좌파 성향의 비판적 지식인들이라는 점은 문제가 되지 못했다. 재건된 암마인 사회연구소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근거지가 됐다. 이들의 논리가 나중에는 과격한 운동권 논리로 비약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의 네오막시즘은 50여년 세월이 지난 현재는 위력을 대부분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학문적 위상은 지금도 여전하다. 사회과학만 강한 것도 아니다. 이 곳에서 수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명성은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대학이 흘러가는 시대의 갈등을 몸소 체험한 경험 그 자체가 대학 발전의 최고 자양분인 것이다.

한국의 지방 국립대들은 수 십 년 전, 선배들이 불의한 정권에 피로써 맞선 영웅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 이것을 학문적 성과로 연결시키면서 국가적으로 국토의 균형발전이 이뤄진다면, 지방대들이 예전의 명성을 되찾는 것은 10년 이내에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최근, 몇몇 국립대를 중심으로 9개 학교를 ‘한국대학교’라는 이름으로 묶는 통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상태를 타개하려는 당사자들의 노력을 국외자들이 지적인 유희를 앞세워 이렇다저렇다 참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충심을 담은 조언은 남기고자 한다. 과연 ‘한국대 부산캠퍼스’와 ‘한국대 대구캠퍼스’ ‘한국대 광주캠퍼스’라는 명칭과 체제에서, 이 배움터들이 한국의 정신적 가치 형성에 기여한 사실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 이미 지방국립대들은 한 울타리에 담기에는 저마다 너무나 큰 역사적 흔적을 남긴 곳들이다. 지금 논의되는 내용이 그런 흔적을 일체의 손실 없이 제대로 담아낼 수 있겠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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