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태조 왕건.

우리 역사에서 고려 태조 왕건은 후덕함이 특히 돋보이는 영웅이다.

 
신라의 경순왕이 항복한 후 그를 태자보다도 높은 정승공으로 후히 대접했고 심지어 평생의 숙적 견훤마저 ‘상보(尙父)’라는 존칭으로 예우했다. 고려 왕족을 멸족시킨 조선태종 이방원과 뚜렷이 비교되고 있다. 또한 난세에 적진으로 도망가는 장수가 있으면 가족을 따라가게 할지언정 보복처벌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왕건도 평생의 오점이 될 만한 비인간적 처사를 저지른 적이 있다.
 
서기 927년, 후백제왕 견훤의 최정예 철기대가 신라의 도읍을 급습했다.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벌이던 신라 경애왕은 백제군에 붙잡혀 견훤이 보는 앞에서 처형됐다. 소식을 듣고 왕건이 서둘러 구원길에 나섰지만 백제군 매복에 걸려 5000 기마대가 몰살당하고 왕건은 필마단기로 사지를 빠져나왔다. 왕건의 최고 심복 신숭겸은 이 전투에서 왕건의 퇴로를 지키다가 전사했다.
 
흉포한 견훤에 대한 공포가 삼한을 가득 매운 반면 신라를 도우러 온 왕건은 더욱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전쟁의 시기에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우선 살 길이다.
 
끔찍한 패전에 따른 패배주의가 고려군을 휩쓸었다. 이후에도 수없는 전투가 벌어졌지만 백제군을 보자마자 고려군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적진으로 망명해가는 고려 장수도 늘어났다.
 
마침내, 왕건 또한 안하던 짓을 하기에 이르렀다. 백제 진영으로 망명한 장수의 가족들을 개경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 참수형을 했던 것이다.
 
그나마 하나 지키고 있던 후덕함의 강점마저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지고 있는 세력이 패배를 확정짓는 전형적 구도이기도 하다. 이 조치가 고려군을 얼마나 안정시켰는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3년후, 왕건은 병산에서 견훤의 철기대 8000을 격멸시켰다. 3년 전의 바로 그 원수들이었다. 이 때 잡은 우세를 왕건은 삼국 통일 때까지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병산 승리의 원인은, 3년 세월 동안 고려의 치밀한 연구와 견훤의 실기(失機)도 거론되지만, 무엇보다 한 두차례의 패전도 쉽게 만회할 수 있는 고려의 영토와 국가 시스템이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배신한 장수 가족들을 죽여서 왕건이 이겼다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후덕하고 천명을 받은 왕건 같은 사람도 상황이 어렵다보면 안하던 짓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돌이켜보고 그것이 잘못됐으면 두 번은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또 한 번의 기회를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10일 매일경제 보도에 따르면,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이 이색적인 지시를 계열사 직원들에게 내린 모양이다. 구 부회장은 “LG전자 뿐만 아니라 다른 계열사 직원들이 어느 회사 휴대전화를 쓰는 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LG전자의 휴대전화 부문이 2.4분기 적자를 기록한 후 이곳저곳에서 있던 사람이 밀려나고 새 사람이 등장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다. 애플 같은 휴대전화 경쟁회사와 업무 관계가 빈번한 직원들은 아이폰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구 부회장의 지시로 인해 뜨악해지지 않을 수 없다.
 
태평성대에서야 “회사가 보다 더 깊은 연구를 하고 있구나” 이해할 수도 있지만, 모시던 본부장이 하루아침에 떨어져 나가는 분위기에서 이런 조사는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LG계열사 직원들이 비록 엄청나게 많다고는 하나 LG 휴대폰이 벌이고 있는 전 세계 시장의 소비자 수효에 비하면 인더스 강변의 모래알이요, LG트윈스 홈 잠실구장의 잔디 한 포기일 뿐이다. 공연히 직원들에게 자신감 상실의 정서만 확산시키리란 비난을 사기 십상이다. 
 
하지만 약 1100년 전 왕건의 일을 생각하면, 이게 그렇게까지 용서 못 받을 추태는 아닐 수도 있다. 한번 이례적인 조치를 강요하면서 CEO부터 마음을 다잡는 계기로 만들 수는 있다.
 
근본적 경쟁력을 높이는 치밀한 연구와 함께 진행된다면 지금의 일은 먼 훗날에 가서 어려웠던 때를 이긴 소박한 역사 한 토막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답을 찾는 진지한 노력 없이 애꿎은 속죄양 가려내는 일만 반복된다면 병산승리를 맛보지 못하는 왕건의 신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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