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불필요한 논쟁으로 더 이상 시간을 소모하지 말아야

[초이스경제 장경순 칼럼] 최근 미국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폭력시위에 대한 러시아 관영 언론 스푸트니크의 지적은 독특하다.

이 매체는 14일자 기사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갈등을 조장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차별이 극심해진 과정에서 등장한 인물이지 그가 차별을 심화시킨 건 아니라는 얘기다.

스푸트니크는 오히려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중 갈등이 격화됐다고 전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사상 최초 흑인대통령이라는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퇴임 때까지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고, 현재도 훌륭한 역대 대통령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사람에 대한 스푸트니크의 평가는 다소 이색적일 수 있다.

이런 얘기가 맞다면, 차라리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지 말았어야 트럼프와 같은 사람의 대통령 취임을 막았을 것이란 얘기인가.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러나 스푸트니크의 주장은 이런 해괴한 논리는 아니다. 말하자면 역사발전에 있어서 일종의 ‘정반합’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사상 최초 흑인대통령의 탄생으로 미국 시민사회의 진보가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일부 깊어지는 이치로, 역사적 반동(反動)도 일시적 힘을 더하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12년 출마했을 때만 해도 그는 유력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후보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 때 재선에 성공한 직후 트럼프는 무분별한 선동발언으로 물의를 빚기까지 했다.

오바마의 두 번째 임기 동안, 인종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를 비롯한 다양한 이슈들이 미국 사회에서 쏟아져 나왔다.

사회적 소수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과연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그 반대의 측면에 대해서도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꽃 배달업자는 친하게 지내는 이웃으로부터 결혼식 꽃 주문을 받았다. 그 이웃은 동성과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업자는 신앙을 이유로 정중하게 주문을 거절하고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다. 얼마 후 그는 이웃으로부터 동성애자 차별을 이유로 고소당했다.

이런 사례들은 “마침내 흑인대통령도 등장했다”는 사회적 성취감과 맞물려 “이제 전통적인 사람들이 그간 겪은 불이익을 보살펴야 한다”는 반대심리 확산을 촉진했다.

4년 전, 전혀 승산 없던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을 넘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심리가 지적되고 있다.

역사적 고민과 거리가 먼 투박한 반발 심리를 등에 없고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후 미국 곳곳에서 전혀 미국답지 않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에어비앤비 예약을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취소한 집주인은 “우리가 이러려고 트럼프를 당선시킨 것 아니다”라고 큰소리쳤다.

버지니아 주 샬러츠빌에서 남북전쟁 때 남군총사령관 로버트 E. 리의 동상을 지키겠다고 폭력시위를 주도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행동을 트럼프 대통령 시대를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물론, 아무리 트럼프 대통령이 대단히 특이한 대통령이라 해도, 그 자리에 있는 이상, 살인폭력시위를 두둔할 수는 없다. 이틀이나 늦어, 등 떠밀린 듯한 면은 좀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백인우월주의자와 나치주의자, KKK 단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폭력행위를 비난했다.

어떻든 지금 미국 사회는 4~5년 전만 해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던 것으로 여겨지던 극단적 차별주의자들이 감히 거리를 차지하고 큰소리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나라가 됐다.

불과 반년전만 해도, 사상 첫 흑인대통령이 두 번이나 성공적 임기를 마치고 있었다.
 

▲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사진=뉴시스.


혹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이 ‘위대한 미국의 종말’을 시작하는 신호라고 주장하지만, 인류문명사를 봤을 때 ‘트럼프 시대’는 ‘오바마 시대’에 대한 반작용의 성격을 우선해서 봐야 할 것이다. 정(正)에서 출발해 반(反)을 거쳐 합(合)에 이르게 되면, 다양성을 중시하는 미국사회는 거부감을 크게 완화시킨 진보의 모델을 제시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러한 ‘정반합’의 이치는 한국시민사회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른바 ‘광주항쟁 북한 관련설’도 여기 해당한다.

조금만 예전 기억을 더듬어본다면, 지금처럼 북한군 관련설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전두환 독재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두환 정권 자체도 이 항쟁을 끝내 북한으로 직접 연결시키지 못했다.

이 시절에는 학생들 데모 때문에 장사 안 된다고 호통 치는 어른들이 오히려 더욱 ‘무연고자’에 대한 의혹을 불식시켰다. 광주와 같은 대도시에는 외지에서 홀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휴대전화는커녕 집전화도 지금처럼 흔치않던 시대였다. 대격변 속에서 이들이 희생되면 연고자를 찾아내기도 힘든 사람들이었다. 어른들은 아직 세상살이를 잘 모르는 젊은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전하면서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친지들과 연락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무연고자가 북한군’이라는 근거 없는 괴소문을 일축했다.

북한군 관련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 것은 2000년 이후다. 광주항쟁 관련으로 사형수가 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한 후다.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광주항쟁’으로 평가가 격상되고 정부차원에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들이 이뤄지면서, 이 또한 한편으로는 산이 높아지면서 골도 깊어지는 현상을 만든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이유로 국가기념식에서 제자리를 못 찾았던 지난 9년은 이런 ‘반(反)’의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탈북언론인 주성하 기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에서는 1998년 금지곡으로 지정됐다고 전한다. 북한 체제에 반대해 목숨 걸고 탈북한 언론인이 하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는 지난 9년 동안 쓸데없는 논쟁에 매달려온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진보에 ‘정반합’의 이치가 적용된다고는 하지만, 노래하나 결론 내리는데 9년 세월이 걸렸다는 것은 해도해도 너무나 한심한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언급해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확인했다.

이 또한, 박정희-전두환 시대 국사교육을 받은 사람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불필요한 논쟁이 있었다. 당시 국정교과서로 공립고등학교에서 역사교육을 받은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대한민국은 1919년 수립된 상하이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국가다. 이는 3.1 운동에서 얻은 민족의 귀중한 전리품이다.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도 했다. 본국 수복을 위한 상륙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정식 참전할 기회를 잃었다. 이로 인해 한국은 연합군의 결정으로 일방적 분단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것이 당시의 역사수업에서 공부한 내용이다.

정작 독재자들도 지금 대다수 시민들이 요구하는 내용과 별 차이 없는 내용을 가르쳤는데, 2008년 이후 돌연 ‘1948년 건국설’이 강조됐다. 이 때문에 한국사회는 철지난 ‘친일논쟁’으로 9년을 소모했다. ‘교학사 교과서’에 이어 ‘국정 교과서’로 옥신각신하며 수없는 세월을 보냈다.

정권을 가졌던 자들이 자신만의 발상을 억지로 들이대다 오히려 국민들의 반발만 초래하고 헛된 세월을 보냈다. 끝내 정권도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지난 정권의 일이다. 지금 정부 또한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만의 ‘선지자적’(일부에서는 ‘완장맨’이라는 격한 용어까지 쓰는)이거나 교조주의적인 자세로 국가이념을 일방적인 방향으로 끌고 갈 경우, 앞선 정권과 비슷한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의 한계와, 시민사회가 내릴 수 있는 유권해석의 간격을 잘 이해한다면 이런 어리석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지나치게 나서게 되면 ‘정(正)’의 힘보다는 ‘반(反)’의 역풍을 초래할 소지가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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