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만필] 조선의 고종(高宗)은 1919년 승하할 때, 태황제에서 태왕으로 격하돼 있었다. 9년 전부터 일제의 강점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1863년 즉위한 그는 1907년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이준을 파견한 것이 빌미가 돼,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됐다. 그 때 태황제로 물러나면서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이 즉위했다.

고종이라는 묘호는 ‘기초를 확립하고 표준을 세운’ 임금에게 올리는 것이다. 그의 승하를 맞아 조선 왕실은 고종, 신종(神宗), 경종(敬宗) 가운데 고종을 선택했다. 유의해야 할 점은 이 과정이 이미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어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끝내 결정적 국권을 빼앗긴 임금에게 ‘기초를 확립하고 표준을 세웠다’는 것이 어처구니없지만, 또 한편으로 그가 잠시나마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고종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중국 은나라의 무정이다. 부열이라는 현인을 등용해 귀방이라는 이민족을 토벌하는 정벌 군주로 은나라 영토를 크게 늘렸다.

고려사에도 제23대 국왕의 묘호가 고종이다. 두 왕조 고종은 모두 40년을 훨씬 넘는 오랜 세월을 통치했다. 이들 임금의 치세 후 국권이 외세에 크게 기울어졌다는 점도 비슷하다.

고려 고종은 치세의 상당기간을 몽고침략에 맞서면서 보냈다. 그러나 100년에 걸친 무인시대를 마침내 종식하고 몽고와 화의를 맺었다. 이제현은 그에 대해 “안으로는 권신들이 정권을 제 마음대로 휘둘렀고, 밖으로는 여진과 몽고가 해마다 침략을 일삼았다... 왕이 조심스런 마음으로 법을 지키고 수치를 묵묵히 견디어 내었기에, 그 왕위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그에 대해 논평했다.

한편으로 충헌왕이라는 시호를 가져서 몽고침략기를 뜻하는 ‘충(忠)’자 임금들의 시초가 된다. 그런 임금에게 고종이라는 묘호가 올라간 것은 어떻든 무인들로부터 국권을 회수한 공로를 중히 여긴 것으로 보인다.

후세에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고려와 조선의 고종 모두 시련 받는 민족사 속에 등장한 ‘역사적 반어법’으로 보인다.
 

▲ 조선의 고종(오른쪽)과 순종(가운데), 고종의 세째아들 영친왕(왼쪽)의 모습. /사진=뉴시스.


최근 일부에서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 1897년의 대한제국 선포를 대한민국 건국으로 간주하자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헌법 제1조에서 민주주의 공화국을 강조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대한제국에서 찾자니, 이 논리대로면 대한민국 초대 국가원수는 고종, 2대 국가원수는 순종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해괴한 논리를 내놓는지, 일각에서는 더 이상 1948년 건국을 고집하기는 어렵고 1919년 임시정부 건국은 거부하고 싶어서 궁여지책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냐 지적하고 있다.

1897년이라면, 2년 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참혹하게 시해된 후 일제의 침탈 야욕이 갈수록 왕성해지던 시기다. 이런 위태위태한 시기의 ‘건원칭제(연호를 세우고 황제를 칭함)’는 상당히 엉뚱한 느낌도 있다.

대한제국 수립에 앞서 고종은 1895년부터 스스로를 ‘대군주 폐하’로 격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동안 중국의 연호 쓰던 것을 폐지하고 완전한 독립국임을 강조하는 것인데, 사실 그 이면에는 일제의 의도가 깃들어있다.

조선사 500년을 중국 속국이었던 것처럼 격하하면서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조선과 중국 간의 사대외교는 현대국가들의 집단안보체제에다 유교적 가치체계를 공유한다는 문화적 의미까지 포함된 것인데, 식민사관은 이것을 중국의 속국 노릇한 것으로 왜곡한다.

그런 식민사관을 가진 자들이라면, 오늘날 외국 군대가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대한민국 또한 속국이라고 여길 것이다.

아무튼 조선이 국세 기우는 와중에 국체를 높이려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을 전부 의미없다 폄하할 수는 없지만, 망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로 오늘날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뿌리를 삼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 건국과 대한제국의 연관관계는 그냥 대한민국과 조선의 관계일 뿐이다.

살다보면 별일도 다 본다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백범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에 대한 좌파 타령이다. 해방 직후, 모든 좌파들이 제일 꺼려하던 민족지사 백범을 오늘날 “좌파들이 선호하는 인물이라서” 10만원권 발행도 연기되고, 1919년 임시정부 법통을 명시한 헌법 전문도 부정되고 있다.
 

▲ 서울 효창공원 백범김구기념관의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사진=뉴시스.


임정을 좌파집단인 것처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은 오랜 일도 아니다. 한 9년 쯤 됐다.

임시정부의 법통이 헌법 전문에 등장할 정도의 ‘헌법 개념화’됐다는 것은, 그만한 실체를 역사에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그냥 간판이나 걸고 세월을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 민족사에 통한은, 임시정부가 망명 프랑스 정부와 같은 전승국 지위를 얻지 못해 분단을 못 막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임시정부는 연합국 가운데 중국의 지지를 확보해 제2차대전 종전 후 한국의 독립을 관철시킨 중요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비록 탄핵으로 중도 퇴진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임기 중 이와 관련해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으로부터 8.15 전승기념일을 공동기념하자는 제안을 받았던 것이다. 전승국 대한민국의 지위를 되찾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를 둘러싼 많은 정치적 문제의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최순실 국정농단’과는 별개로 평가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 마저 외교의 균형을 잃으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의 세계질서가 제2차세계대전 직후와 달리 상당히 아시아 쪽으로 중심추가 넘어온 가운데 중국의 이런 제안은 비록 의도가 외교적 방편의 하나였다 하더라도 시일이 지날수록 깊은 의미를 남길 수 있는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석으로 일단락되고 그 후 양국 관계가 경색돼 더 이상의 진척은 없지만, 언제든 양식있는 아시아 사회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다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사족으로, ‘백범일지’에 있는 내용 하나를 소개한다. 백범 선생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만세”를 외치자 선생은 “황태자 전하도 ‘천세’라고 밖에 못하는데, ‘만세’라니요”라며 안절부절 했다. 주위 사람들이 “개화세상에서는 그런 것 안 따집니다”고 그를 안심시켰다.

선생은 백범일지 초반 곳곳에서 고종으로부터 받은 깊은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에 격분해 일본 군관을 살해했고 그 때문에 중죄인이 돼서 갇혔지만, 죽을 고비마다 임금께서 내리신 은혜로 일제의 살기를 피했다고 전한다.

이런 사상을 가진 분을 오늘날 좌파들의 영웅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임시정부에 대해 헛소리를 더 심하게 하기 전에 백범일지를 한번 읽어볼 것을 권유한다. 학교 다닐 때 필시 ‘필독도서’였을 텐데, “대학 가는데 무슨 도움이 되냐”며 외면했다면, 어른 돼서라도 한번은 꼭 읽어보기 바란다.

느끼는 바가 있으면 아끼는 지인에게 선물해 보라. 그가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내가 경험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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