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업인의 트레킹 이야기(2)...고성과의 첫 인연은 여유로움의 연속이었다

▲ 박성기 대표

[외부 기고=박성기 도보여행가, 도서출판 깊은 샘 대표] 2017년 8월 19일 토요일, 밤새 쏟아 붓던 장대비는 물러가고 간혹 가랑비가 내린다. 예(濊)의 땅 속초 장사항에서 고성 삼포항까지 해파랑길 46코스를 걷기로 했다. 우리 같은 직장인이 걷기엔 여유로움 넘치는 낭만적인 코스라 여겨져 소개하기로 한다.

비옷이며 배낭 덮개를 단단히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준비 안했다가 느닷없이 당한다면 얼마나 낭패인가.

장사항은 조그마한 어항이다. 주위에는 횟집과 활어판매장들이 회를 썰면서 지나는 손님들을 유혹한다. 벌써 배가 출출하다.

중년 부부는 배 갑판 위에 나란히 앉아 그물코를 능숙하게 손질하고 있다. 나의 카메라는 그들의 삶을 경건히 투영하고 있다.

호리병 모양의 항구를 따라 걸어 돌아갔다. 만만한 완보로 완상하면서 걸었다. 걸음이 여유로워지면서 마음이 방랑해졌다.

▲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장사항을 지나면 바로 고성이다. 그토록 오랜 동안 전국을 떠돌아 다녔어도 고성은 인연이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인연을 만드는 중이다.

어젯밤 비로 산 밑 한 자락이 움큼 쓸려 나갔다. 조금만 더 내렸다면 큰 일을 치렀을 터였다.

고성은 남북 모두가 같이 나눠 가지고 있는 최전방이다. 까리타스수녀회의 마테오 요양원을 지나 바다정원 카페다.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카페에는 젊은 연인들로 가득하다.

바다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어 남북의 아픔을 느끼게 했다. 우리의 모습이려니.... 이후에도 계속 군데군데 철망은 고성만의 독특한 모습을 갖게 한다.

솔숲을 지나 용천교를 건너 봉포(鳳浦) 해변에 다다랐다.

봉포에 들어서자 가슴이 시원해지고, 바다 내음에서 단맛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바다는 수많은 카페건물들로 에워싸여 있다. 지나다 이층 창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해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오늘따라 날이 덥지 않고 선선한데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넘실대는 파도, 수많은 사람들, 손잡고 해변을 걷는 연인들....
봉포는 멋진 바다다.

천진해변은 물이 맑았다.

모래 둔덕 위에서 바람 부는 바다를 바라본다. 거친 파도는 앞 파도를 밀고 짓쳐들어온다. 쫓겨 온 파도는 흩뿌리며 해변에 잔뜩 모래를 토해낸다.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밟으면 점점 빠져 들어가는 발을 옮기며 모래사장 위를 걸었다. 발자국을 더 깊게 찍으며 내 존재를 각인했다.

얼마 후 나의 흔적은 없어지겠지. 
내 존재의 가벼움을 포장하고 청간정을 향했다.

청간정 앞에 이르자 비가 쏟아진다. 금방 그칠 것 같아 정자 아래 매점 처마에 비를 피하며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주인아저씨는 바로 앞 청간정을 제쳐두고 아야진 해변 지나 있는 천학정이 최고라고 침을 튀긴다.

커피 한 잔에 몸을 녹이는 동안 비가 그쳤다. 노송 사이로 우뚝한 청간정 정자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니 망망한 바다다. 설악에서 흘러내린 청간천이 정자를 맴돌아 바다로 흘러든다. 바다에 우뚝 솟아 오연히 동해를 바라보니, 조선의 최고의 화가 정선과 김홍도는 <청간정도(淸澗亭圖)>를 그려 감동을 표현하였다.

▲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선인들은 청간정을 관동8경 중 제일 윗자리에 두었으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곳에서 일출과 월출을 보겠노라 후일을 다짐한다.

청간정을 내려와서 청간 해변을 지나니 내 걸음의 종착지도 점점 다가온다. 조금씩 오다말다 하는 비에 우의를 입다 말다하니 많이 덥고 몸은 분주하다. 무거운 카메라를 목에 메니 목도 아프다.

도중 좋은 카페를 만나 몸도 쉬고 커피를 마시며 해찰하다보니 시간은 지체되고 물배만 채운다. 오늘은 천천히 여유롭게 걷다보니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이렇게 호젓하게 혼자 걸어보는 게 참으로 오랜만이다.

아야진 해변에 들어섰다. 마을에서 반암리로 넘어가는 산의 모양이 한자 잇기 ‘야(也)’를 닮았고, 여기에 ‘우리’라는 뜻의 ‘아(我)’를 포함해서 <아야진(我也津)>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크지 않은 항구인데도 남과 북 두 곳에 포구가 조성돼 있다. 바닷가를 따라 길게 만들어진 길옆으로 멋진 카페가 많아 자꾸 길을 멈춰서 커피 한 잔을 유혹한다. 결국 이기지 못하고 이층 테라스에 목 좋은 자리를 잡았다. 바다를 즐기고 카페를 찾는 대부분이 젊은 연인들이다. 그들로 인해 고성 바다가 더 젊어 보인다.

천학정이다.

산위에 근사한 정자를 연상하고 올랐더니 커다란 바위에 소나무가 가운데 신기하게 박혀서 산을 덮었다. 천년도 훨씬 넘었다는 천학정 소나무는 당산(堂山)을 볼 때와 같은 기운을 느낀다. 숲으로 사방이 어둑하니 더욱 그러했다.

청간정 매점 아저씨말대로 아주 좋고 멋지다는 것 말고도 세월의 이야기를 잔뜩 품고 있어 보였다.

비가 느닷없이 자꾸 내리고 시간이 한정되어 지나치지만 한동안 앉아서 세월을 담은 이야기를 생각하고 싶다. 비가 점점 거세진다. 하늘은 열대의 우기처럼 아주 괜찮다가도 비를 쏟아내곤 한다. 변덕스럽다.

천학정을 지나니 고암해변과 문암해변을 지난다.

이곳 해변은 스쿠버들의 천국인가 싶다. 많은 스쿠버들이 거친 바다의 물결을 즐기고 있었다. 스쿠버 장비를 가지고 스쿠버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우리와 전혀 다른 시간의 사람들이다. 온통 늘어놓은 장비와 즐기는 그들을 보면서 걷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 몰랐다. 저녁 7시 10분 버스를 예매했는데 벌써 다섯 시다. 삼포해변까지 트레킹 하고 가려면 서둘러야한다.

▲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문암해변 끝자락 능파대에 이르렀다.

수억 년 동안 이리저리 뒤틀려진 괴이한 모양의 암석이 파도가 부딪히고, 마모되고 다듬어졌다. 파도는 바위를 치면서 아름다운 포말을 만들었다. 능파대(凌波臺)란 이름도 바위에 부딪히며 넘실대는 모습을 아름답게 소화해 낸다.

백도와 문암해변을 가로지르는 문암천의 물이 거세게 바다로 흘러들어왔다. 물이 많고 거센 것으로 보아 어제 내린 비 탓이다. 군인들이 지나는 철망교를 건너는데 아래로 흐르는 물이 거세서 살짝 긴장이 된다.

백도해변에 들어섰다.

시간은 벌써 여섯시가 다 되어간다. 오늘의 여정은 여기에서 마쳐야 한다. 2킬로만 더 가면 목적지 삼포인데 천천히 하나씩 즐기다보니 일곱 시간이 흘렀다.

연인은 백사장에서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다. 아름다운 백도해변을 배경으로 연인의 아름다움을 담으려는 게 분명하다. 나도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한 컷 담으며 동참하고선 아름다운 고성바다를 떠나왔다.

바다는 우리처럼 경제활동 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사람들에겐 더 없는 마음의 안식처다.


<바  다>

김소월


뛰노는 흰 물결이 일고 또 잦는
붉은 풀이 자라는 바다는 어디

고기 잡이꾼들이 배 위에 앉아
사랑 노래 부르는 바다는 어디

파랗게 좋이 물든 남빛 하늘에
저녁놀 스러지는 바다는 어디

곳 없이 떠다니는 늙은 물새가
떼를 지어 좇니는 바다는 어디

건너서서 저편은 딴 나라이라
가고 싶은 그리운 바다는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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